중년남자의 내면 엿보기
<하종강의 중년일기 철들지 않는다는 것>
이명옥(mmsarah) 기자
저자 하종강의 프로필을 보았다. 30년 가까이 노동 상담을 해오고 있단다. 한마디로 무시무시하리만치 우직한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천연기념물이나 희귀동물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세월을 거스르며 순수를 지켜 온 사람.
'마흔 살 이후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한 사람은 링컨이다. 하종강은 자기 얼굴에 책임질 나이인 불혹도 쉰인 지천명도 넘어, 이순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라 했다. 그런데 그의 중년일기 <철들지 않는다는 것>에서는 도무지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철들지 않은 순수함 때문일까? 세월의 무게만이 아니라, 25년간 노동자들과 씨름해 온 노동문제 전문가에게 적합함직한 쌈닭 특유의 전투적 용어로 무장된 촌철살인의 분석과 비평, 비아냥과 냉소조차 그의 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새벽녘에 서울에 도착해 고속도로를 벗어나니 아스팔트 길바닥에 큰 글씨로 '사랑'이라고 써 있는 것이다. '아니, 이건 또 뭐야? 서울이라는 도시가 언제부터 이렇게 낭만적이었지?' 싶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당'이라는 이정표였다. '사당'이라는 글씨를 굳이 '사랑'이라고 읽으며 길을 달렸다. 추운 겨울, 혼자 길을 다니며 스스로 따뜻해지는 방법들이다.
'사당'을 '사랑'으로 읽으며 전국 노동자들에게 순회강연을 하는 남자. 수필의 경지를 넘어 시적 감수성이 철철 넘쳐나는 중년 남자의 일기라. 한 마디로 경이로웠다.
사실 나는 여성이면서도 섬세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지 못한다. 그래서 내면에 풍부한 감성의 샘이 흘러 그냥 끄적이기만 해도 시가 되고, 입을 열기만 해도 노래가 되는 사람들에게 열등감이 있는 나로서는, 그의 글에서 또 한 번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노동판 경력 수십 년이면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라도 거칠고 전투적인 사람으로 변했음직한데 그의 글은 어느 한 군데도 거친 부분이 없다. 심지어 투쟁이나 지인의 죽음을 기억하는 장면조차 그의 글에서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생의 거친 들판이나 봉우리를 한 번도 넘어보지 않은 도시 소녀 같은 설렘과 풋풋함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그의 글이 아름다움과 섬세함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그의 고운 글에는 비전향자였던 김동기님을 만나지 못한 죄송함을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 읽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울림이 있고, 일상을 따스하게 그려내 읽는 이가 자기도 모르게 배시시 미소 짓게 하는 평안함이 있다.
또 연인끼리 마주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듯 존재를 뒤흔드는 알 수 없는 떨림도 있다. 그것은 오랜 세월 현장에 머물면서도 아직도 그가 지켜낸 순수(책의 표현을 빌자면 철들지 않음)의 빛이 발하는 광채이리라 혼자 단정해 본다.
거칠고 전투적인 용어가 아니어도 노동 현장의 투박함과 절박성을 절절하게 드러내고,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온화한 시선들이 글의 행간마다 스며있는 그의 글은 그가 쌓아온 필력이 만만찮음을 잘 보여준다.
아름다운 중년을 프랑스어 표현으로 벨아주(Belle age)라고 한다. 몸과 마음이 한껏 성숙한 경지에 이른 완숙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말이다. 그는 몸과 마음이 아름다운 완숙의 경지에 이른 벨아주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불혹과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선 중년 남자의 글에서 오월의 신록 같은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그가 슬쩍 내비친 내면을 엿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어디선가 그를 만난다면 글에서 느꼈던 따스함 때문에 오랜 지기 만큼이나 친근하게 느껴질 것 같아서다. 노동조합과 짝사랑을 하기에 죽도록 연애하는 청춘남녀들이 별로 부럽지 않다는 순수 남, 그와 시시콜콜 주고 받아할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이라면 책이든 그의 홈페이지든 그의 내면을 미리 충분히 엿보고 난 뒤, 그와 대면하는 지혜를 발휘하면 더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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