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배경이 무척 아름다운 가족용 영화인 <어거스트 러쉬>. 이 영화는 음악을 매개로 한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하룻밤의 사랑을 나눈 연인과 그 사랑의 결실인 아이가 고아원에 버려지지만 음악을 매개로 결국은 모두 만나게 된다는 기본 줄거리를 갖고 있다. 조금은 진부한 스토리이지만 아름다운 음악과 배경을 바탕으로 담아내고 있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엄마와 대중음악을 하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는 절대 음감을 지닌 음악 신동이다. 그래서 모든 자연의 소리를 악보에 담아낸다.
바람이 창문에 스치는 소리부터 밤하늘의 교교한 달빛의 속삭임까지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아이는 분명 자기를 열 달 동안 뱃속에 넣어 기른 엄마의 심장의 박동소리를 기억하고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렇게 그들은 음악을 매개로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의 끈을 이어가고 결국은 아름다운 사랑의 하모니를 이루며 다시 만나게 된다.
물질의 풍요로움과 기계 문명이 인간에게 편리함을 가져다 준 대가로 사람들은 동화적인 환상, 자연과의 교감, 사랑에의 확신과 같은 귀중한 것들을 내놓았다. 바쁜 현대인들은 이제 어지간해서는 풀벌레 소리가 어쩌구, 달님의 속삭임이 어쩌구 하면서 숲길을 거닐거나 하늘의 달을 우러르는 일은 없다. 더불어 천생연분이니, 영혼의 교감이니 하는 사랑에 대한 환상 또한 사라져 가는 듯하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환상이 영원히 사라질 수는 없기에 사람들은 천상의 선율을 빌어서라도 잃어버린 사랑의 환상을 되살려 보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아주 오래 전 나는 일반적인 잣대로 보자면 조금은 불경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내적 고백서를 쓴 일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매디슨카운트의 다리>라는 책을 읽고 난 후였던 것 같다.
그 내용의 일부를 옮겨보면 이렇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세상의 나 같은 타인
내겐 남편보다 나를 더 잘 알고 남편보다 더 오랜 지기가 하나 있다. 짐작하셨겠지만 그는 물론 남자이다. 그와는 그 흔한 악수 한 번 제대로 나눈 기억이 없다.
(중략)
그러나 그를 생각하거나 또 그와 만나 대화를 하고 있으면 또 다른 내가 세상 밖에 존재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곤 했었다. 그만큼 그와 나의 정신세계며, 사고 유형이 닮아있다는 얘기다. 너무나 닮은 남자와 여자…….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사람은 타인이 아닌, 바로 나 자신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중략)
난 운명적인 사랑은 있으며 그 사랑은 분명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시점에서 작용되어 짐을 확신한다. 물론 이런 말로 나의 지기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인간에겐 자기통제 불능의 영역이 확실히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을 뿐….
(중략)
그도 나도 더 나이가 들고 인생의 길이 환히 보일 때 쯤, 안개 걷힌 새벽의 상큼함으로 다시 만나고 싶다. 때론 이 세상 그 어느 곳에 나와 똑같이 닮은 이성이 하나 살고 있고, 그와 아름다운 노년이 되어서 만나리라는 희망 하나만으로도 내게 힘이 될 때가 있다.
내 글을 읽은 사람들은 그와 나의 관계를 아무런 저항감 없이 영혼의 동반자(soul-mate)라 불러주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난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말을 결코 믿지 않는다.
하지만 신의 선물이라는 음악, 즉 천상의 선율이 가져다주는 인간의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는 놀라운 능력과 기적만큼은 조금도 부인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절대 음감의 선율로 풀어낸 사랑이라는 환상에 빠진 날의 행복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
가을은 이미 가고 없지만 오늘은 왠지 자끄 프레베르의 '고엽(Les feuilles mortes)'의 가사가 흥얼거려진다.
우리가 닮은 것은 노래에서였지( C'est une chanson qui nous ressemble)
그대는 나를 사랑했고, 나 또한 그대를 사랑하여 (Toi, tu m'aimais, moi, je t'aimais)
둘이서 함께 살았다네( Nous vivions tous les deux ensemble)
절대 음감의 선율로 풀어낸 사랑이라는 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