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댁에선 몇 년 전부터 제사를 모두 모아 하루에 지냅니다.
매년 4월 첫 주 일요일 오전에 ‘합제’를 지내지요
올해에도 아침 일찍 시댁에 가서 나물 다듬으며 손이 바쁜 중인데,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가 영어로 뭐냐고 시어머니께서 물으시네요.
갑자기 영어는 왜 필요하냐고 여쭸더니,
"요즘 노인정에서 늙은들이 손자들에게 배운 영어로 뭐라고 씨부렁거려서 내가 정확허니 따박따박 영어로 말해줄라고 그란다. 그라니께 쩌그다가 ‘애비씨’를 쓰고 아래에따 워치케 잉는지 한글로 잘 보이게끔 써주라."
어머니께서 영어를 배우실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 한국말을 해야지 웬 영어를 하냐고 혼내주시라고 했더니,
"나넌 여적지 일본말로 혔는디~!" 라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그러시면서 요즘은 애고 어른이고 영어를 잘 해야겠다며, "땡큐!"는 무슨 뜻이냐고 하십니다.
우리 어머니 연세는 88세. 윤선도의 13대 손임을 늘 강조하시면서 한자 쓰는 것을 좋아하시더니 이제는 그분이 영어를 배우려고 하십니다. 그것도 노인정에서 사용하려고 말입니다. 노인들이 모여 잘난 체하기 위해 일본말과 사투리 억양의 영어를 마구 섞어 사용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집니다.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한 후 설거지까지 끝내고 과일을 깎을 때에서야 우리 며느리들은 커피를 마시며 숨을 돌립니다.
과일을 깎고 있는데 아랫동서가 다섯 살 된 조카아이를 부릅니다.
“스캇! 스캇아 이리 와서 사과 먹어!”
이름이 어째 그러냐고 물었더니, 영어유치원에서 그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아이가 글자를 쓰지는 못해도 대화는 된다고 선생님이 칭찬을 해주었다고 자랑이 대단합니다.
그러면서 스캇에게 10까지 영어로 세어보라고 합니다.
“원, 투, 뚜리”를 발음하는 아이를 보자 슬슬 장난기가 돕니다.
“난 백까지도 셀 수 있는데. 넌 못 세지?”
“나두 투웨니까지 할 수 있는데. 원, 투, 뚜리, 포어.......”
중간 중간 빼먹으면서 20까지 셉니다.
우리말로 시켜 보았더니 십까지도 잘 세지 못하더군요.
이번에는 그 아이가 저를 시험합니다.
내가 영어로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게지요.
자기가 말하는 걸 영어로 말하라고 합니다. ㅋㅋ
영어로 대화를 한다니 살짝 겁이 나기도 하더군요.^ ^;;
“개미” “ant" "사과” “apple" "고양이” “cat" 묻자마자 바로바로 대답하니 아이가 좀 오래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이건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지 묻습니다.
“악어!!!”
“I know two kinds of 악어. crocodile and alligator."라고 대답했더니,
드디어 아이가 저를 인정하고 다른 데로 가버립니다.
"헤이, 스캇! 웨어아유고잉? 레쯔터커바웃썸띵모어인잉글뤼쉬~!”라고 좔좔 말했더니,
아이가 저를 흘끔 보고는 안방으로 얼른 들어가 버립니다.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있는데 동서가 스캇의 친구인 탐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 애는 소심해서 영어를 잘 못하는데 탐네 엄마가 약이 올라서인지 학원에 자주 찾아간다더군요.
그런다고 영어를 잘 할 것 같지는 않다면서요.
시동생까지 합세해서 탐네 엄마와 있었던 얘기를 하는데 제가 갑자기 이민 생활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슴이 답답해지기에 언젠가 개그에서 본 이야기를 흉내 내어 큰 소리로 말하며 일어섰습니다.
“‘오렌지’ 아니죠~‘어린지’ 맞씀다. ‘탐네 엄마’ 아니죠~, ‘Tom's Mother' 맞씀다!”
시어머니는 제사를 지낸 날 오후에는 제사 지낸 음식중 제일 좋은 음식들만 골라서 싸들고 노인정에 가십니다.
그날도 노인정으로 가시면서 지팡이를 대신하는 보행보조기를 찾으십니다.
"내 '워커'좀 꺼내다구~!!!"
제삿날에 영어 놀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