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회자되고 있는 말'이란다. 원로들의 주장이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국선언에 동참한 사람들 일동'이 낸 시국선언문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수구신문들은 지면을 '도배질'했다. <조선일보> 1면 표제는 제법 묵직하다. "원로 1500여명 건국 후 최대규모 시국선언"이다. 사설은 시국선언이 "1970년대 유신 시대와 80년대 군부 독재 하에서 정권에 비판적인 원로들과 지식인들의 유력한 현실참여 방식"이었다고 같은 반열에 놓는다.
눈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순진하다는 나무람을 각오하고 묻는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정녕 그렇게 생각하는가. 저 군부독재와 맞서 싸웠던 민주인사들의 시국선언과 오늘의 '원로 선언'의 무게가 참으로 같은가.
오직 하나만 짚어보자. 과연 오늘의 '원로'들은 시국선언을 한 뒤 '공안당국'에 줄줄이 체포되었는가. 정반대 아닌가. 군부 독재와 싸웠던 시국선언 참가자들을 잡아 가둔 바로 그 인물들이 오늘의 시국선언문에 버젓이 원로라는 이름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은가.
보라. 저 1980년 오월의 총리 신현확이 '상징'하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누가 허문도와 이원홍 따위를 '원로'라고 불렀는가.
아무리 이해하고 싶어도 납득할 수 없다. 대체 이 땅의 언론에 재갈을 물렸던 자들까지 버젓이 '원로'라고 보도하는 수구신문 '언론인들'의 머리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과연 그 신문에, 오늘의 한국 저널리즘에 '기자정신'이란 있는 걸까.
조선일보는 짐짓 엄숙하게 묻는다. "겉으로는 국민적 단결과 화합이 이루어진 듯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분열과 갈등이 내연하고 있던 그 시대의 바닥을 흐르던 목소리를 대변했던 시국선언이 오늘 다시 들려오게 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뭇 준엄한 질문을 <중앙일보>도 거든다. '보안법 충돌, 나라가 흔들린다'는 사설은 "상황을 보는 마음은 참으로 답답하다"면서 따진다. "우리가 이럴 때인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가."
거듭 순진하게도, 나는 참으로 묻고싶다. 두 신문은 정녕 몰라서 묻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모르는가.
'이 지경까지 온' 까닭부터 냉철히 톺아볼 일이다. 수구신문, 부자신문의 호들갑처럼 '이념적 내란'이 빚어진 것은 바로 자신들이 의문사진상규명 작업에 엉뚱한 '색깔공세'를 퍼부으면서, 노무현 정권의 정체성을 거론해서 아닌가. 불을 지른 방화범이 도대체 누가 불을 질렀느냐고 개탄한다면 우리 그를 일러 무엇이라 불러야 옳은가. 정직하게 답할 일이다.
조선일보의 물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답은 더 자명하다. "대한민국이 공산화됐다"는 원로들의 '높은 뜻'이 지닌 의미를 굳이 설명해야 옳은가. 민주주의의 가장 밑절미인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고 2000년 남북공동선언마저 "명백히 우리 헌법을 위반한" 것이라는 저 선언의 뜻은 무엇인가. 우리 '원로'들에게는 민주공화국을 유린한 군부독재의 헌법이 아직도 유효한 걸까.
노무현 체제를 일러 '공산화'됐다고 판단한다면, 사회당·노동당이 집권하고 있는 영국·독일·스웨덴은 어떤 나라일까. 21세기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기 참으로 민망한 일 아닌가. '대한민국 원로' 1500여명이 시국선언문을 내놓으며 살천스레 공산화를 거론하는 풍경은 차라리 슬프지 않은가.
게다가 그들은 "지난 60년간 대한민국의 편에 서준 맹망에 대해 변함없는 신뢰를 재확인하면서 미국에 요구"한다. "한미연합사령부의 연합작전 체제를 확고하게 유지"하란다. 그래서다. 이미 조지 부시가 두렵다고 고백한 나는 우리 '원로' 1500여명이 무섭다.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때, 보수주의자 가인 김병로가 국가보안법에 부정적이었던 사실을 되돌아보면 더 그렇다. 도대체 대화와 토론이 가능하지 않은 '원로들'이 대한민국에 1500명이나 되고, 그들을 1970년대의 시국선언과 같은 위상으로 부추기는 '언론'을 보기란 끔찍한 일이다.
이 나라가 '대통령을 가진 국민'과 '대통령을 못 가진 국민'으로 갈라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개탄하는 저 '최고 신문'을 보라. 참으로 무서운 사람들 아닌가. 민주주의를 일궈온 우리가 '무장해제' 말아야 할 진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대한민국이 이미 공산화됐다고? /손석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