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4년 간첩죄로 무기징역형을 받은 뒤 98년 특사로 풀려난 함주명(74)씨가 21년만에 간첩혐의를 벗게됐다. 서울고등법원 형사4부(재판장 이호원)가 15일 재심청구 선고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다음은 지난 6월15일에 열린 14차 재판(결심)에서 함주명씨의 최후진술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1954년 전쟁때 헤어진 가족을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북쪽 땅에서 외롭게 견디며, 남파공작원을 자원하여 남파된 제가, 자수하여 가족들의 품에 안긴 것이 1954년, 지금으로부터 51년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의 이근안을 비롯한 수사관들에게 납치되듯이 끌려온 때가 1983년이었고,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998년 8월에서야 저는 다시 가족에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건대, 홍종수라는 남파간첩의 자술서를 근거로, 이근안씨가 사실을 부풀리고 왜곡하여 간첩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근안이 초기 수사에서 우순학을 저의 재북처로 조작한 것도, 결국 홍종수의 자술서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재북시 하숙집 딸인 우순학을 사춘기에 좋아 지내기는 했지만, 결혼한 적이 없는 19살의 어린 나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북에 있을때, 우순학에게 들은 얘기지만 남쪽에 언니 둘과 남동생인가 오빠가 한명 있다고 했는데, 제가 만일 우순학과 결혼하였다면, 자수하여 풀려나와서 어찌 만나보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은 태어나서 모두들 자기 나름의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꿈이 이뤄지기도 하고, 이뤄지지 않기도 하지만, 그 꿈을 버리지 않고 기어코 이루려는 사람들에게 인생은 언젠가 보답을 꼭 해준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 역시 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스무살 즈음에는 이북에 홀로 남겨진 제 처지 때문에 꼭 가족을 만나기 위해 남쪽으로 가겠다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이루고자, 남파공작원을 자원하여 남파된 즉시 자수하여 가족품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웠던 그 시기에 저 역시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폐품팔이, 테입 복사, 사진점, 분식점 안해본 일이 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새로 태어난 아이들이 있었고, 아내가 있었기에 세상의 모든 가장들처럼 어려워도 어려운 줄 모르고 3, 40대를 살아왔습니다.
그 와중에 가난에 못이긴 처가 이혼을 하자고 해서 이혼을 하기도 하였지만, 수년후에 지금의 부인을 만나 보금자리를 꾸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30년을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가족을 책임지는 평범한 가장으로서 살아왔습니다.
1983년 제운명이 바뀔 줄,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68년도엔가, 중앙정보부로부터 요시찰 대상에서 해제되었다는 통보도 있었거니와, 저에게는 살뜰이 보살펴야 할 가족이 있었습니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의 45일동안은 더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그때 그 처참하고, 죽을 것만 같았던 분위기들이 떠오르면 자다가도 식은 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나기도 합니다만….
제가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간첩으로 송치되었을때, 저는 검사님에게, 또 판사님에게 저는 “고문을 당해서, 허위자백을 했습니다. 다시 조사해 주십시오!” 울고 또 울면서 매달리고 호소했지만 그 누구도 제 주장을 귀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16년 감옥살이는 가파르기만 했습니다. 왜 이 감옥에 있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분노와 좌절의 시간이었지요. 죽고싶은 마음이 어디 한두번이었겠습니까. 그때마다 ‘간첩’ 자식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이 아비한테 원망한 번 비치지 않았던 내 자식들, 어느날 간첩 마누라가 되어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면서도 자식들 훌륭히 키워 대학교육까지 맟춘 내 안사람을 생각해서 꼭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그때, 저는 다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져 내리는 희망을 다잡게 해준 것은, 바로 그 꿈이었습니다. 불쌍한 내 자식들, 그리고 가족들에게 내가 ‘간첩’임을 남기고 갈 수는 없다, 내 자식들을 ‘간첩자식’으로 살게 할 수 없다, 내가 고문당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한다.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꿈이 16년, 하루같이 밤을 뒤척이면서도, 단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는, 저를 살아가게 해준 희망이었습니다.
99년 이근안씨가 자수하여, 서울지검에서 대질심문을 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이근안씨는 저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건넸습니다. 감옥살이 16년 동안 단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었던 얼굴인데, 너무나 많은 원망과 저주를 해왔던 얼굴인데, 초췌한 수인이 되어 있는 걸 보니, 게다가 “미안하다”는 그 사람의 그 한마디가 16년 동안의 분노와 원망을 어느정도 잠재워 주더군요. 그때, 저는 내가 고문당했다는 사실, 전기고문 당하고, 물고문 당하고, 인간이하의 수치스런 고문을 당했다는 주장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내 말이 진실이었음을 인정받았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제 제 나이 일흔 다섯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지요. 그러나 일흔 다섯인 저에게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1984년 이래 한번도 변치 않았던 꿈입니다. 아니 꿈속에서라도 단 한번만이라도 이뤄보고 싶었던 꿈입니다.
‘간첩’ 자식이 되어 한번도 기펴고 살아보지 못한 내 자식들, 그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진실을 보여주고 싶은 꿈입니다. 아버지가 간첩이라서, 마음에 둔 여인과 혼인에 이르지 못한채 이 못난 애비 때문에 좌절을 맛봐야 했던 셋째녀석을 이제 떳떳하게 장가보내고 싶은 꿈입니다.
그런 자식들의 고통을 견뎌내며 감옥에 있는 남편 뒷바라지에 청춘과 중년을 다 보내버린 제 아내에게 죽기전에 기쁨을 안겨주고 싶은 꿈입니다.
동네사람들 심지어 먼 친지들에게까지 얼굴 한번 들지 못하고 살았던 제 누님, 제가 남쪽으로 내려온 이래로부터 지금까지 못난 동생 돌봐주고 계시는 누님을 비롯한 형들에게 살아생전에 진실을 안겨드리고 싶은 꿈입니다.
못난 저로 인해 너무나 큰 고초를 겪어야 했던 우리 형님, 누님, 어머님, 이 모든 가족들에게 진실을 보여주고 싶은 꿈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지금 일흔 다섯으로, 인생의 마지막에 서 있지만,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지도 못합니다. 본인보다 우선하여 가족들을 생각하면 반드시 억울한 누명을 벗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재심청구를 받아들여주시고, 재심 재판을 이끌어주신 이호원 부장판사님, 그리고 검사님, 무엇보다 저와 제 가족의 고통에 귀기울여주시고 변론을 맡아주신 조용환 변호사님, 감사드립니다.
한번도 기펴고 살지 못한 '간첩자식'들을 위해/함주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