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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 25.

성자(聖者, ‘聖’字)의 조건/전호근

글쓴이: 이정호 날짜: 2009.06.16. 07:11:49 조회: 582 글쓴이IP: 219.248.201.79

우리 문화교양학과 3학년 교과목 [동양철학산책]의 저자이자
담당교수이신 전호근 박사의 글입니다..
출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홈페이지

성자(聖者, ‘聖’字)의 조건/전호근

1. 공자는 언제 도를 알았는가

공자는 일찍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문도 夕死可矣).”고 한 적이 있다. 뚱딴지같은 물음을 한번 던져보자. 그렇다면 공자는 언제 도를 들었을까? 『논어』「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간이회고록에 따르면 공자가 천명을 안 게 50세 때였다[五十而知天命]. 천명을 안다는 것은 하늘이 나에게 어떤 일을 하게 했는지 곧 어떤 길을 가게 했는지 알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도를 안 것이 50세 때였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장자』「천운」편에 따르면 공자가 나이 오십 하고도 하나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도를 듣지 못해서 남쪽으로 노자를 찾아가 도가 뭔지 물었다고 풍자하고 있다. 혹자는 이걸 두고 공자가 나이 오십에 이르도록 도를 알지 못했다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때문에 공자가 50세에 도를 알았다고 여긴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장자가 보기에도 지천명의 ‘천명’이 바로 ‘도’를 의미한다고 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장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공자 스스로 도를 안 게 50세 때였다고 말한 것만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한자에서 ‘길 도(道)’자는 길을 나타내는 ‘辶(착)’에 사람 머리를 뜻하는 ‘首(수)’자를 올려놓은 모양이다. 그래서 일본의 어떤 학자는 ‘고대에는 전쟁이 끝나면 적장의 머리를 길가에 파묻었는데 그런 풍습에서 이 같은 글자가 생긴 것’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글자 풀이는 재미는 있지만 문자를 이해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된다. 글자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려면 글자마다 이야기를 한 가지씩 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한자는 오만 자가 넘으니 오만가지 이야기를 지어내야 할 판이다.

首는 사람의 머리를 뜻하지만 그 중에서도 눈을 강조한 글자이다. 예를 들어 얼굴을 뜻하는 ‘面(면)’자에서 볼따구를 그린 좌우의 ‘ㄷ, 그’ 모양을 제외하고 가운데의 ‘目(목)’자만 남겨둔 데다가 위에 머리카락을 뜻하는 ‘い’표시를 붙인 게 머리수(首)자다. 길을 뜻하는 ‘辶’자와 머리, 그 중에서도 눈을 강조한 글자인 ‘首’가 합쳐진 ‘道’는 갈 길을 아는 사람, 곧 ‘길 눈 밝은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道’와 짝을 이루는 글자가 있다. 바로 德(덕)자이다. 덕은 왼쪽에 있는 ‘彳(척)’자가 길을 뜻한다. 그리고 오른 쪽에 ‘十’, ‘目’, ‘一’, ‘心’ 등이 있는데 여기서 ‘一’과 ‘心’은 나중에 붙은 요소이고, 원래는 ‘길[彳]’과 ‘열 개의 눈[十目]’이 붙어 있는 글자다. 결국 ‘德’자는 구성 요소가 ‘道’자와 거의 같다. 그래서 ‘道’와 마찬가지로 ‘길 눈 밝은 사람’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道’자와 ‘德’자는 모두 ‘길’과 ‘사람’이 만난 모양의 글자로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이란 뜻이다. 노자의 『道德經』은 ‘道’와 ‘德’이 무엇인지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가장 오래 된 ‘길안내 책’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아무튼 공자는 나이 오십에 도를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칠십삼 세가 될 때까지 살았다. 간혹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 말을 걸고넘어지면서 공자는 왜 죽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 도를 아는 것[知]과 도를 듣는 것[聞]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앎을 뜻하는 ‘知(지)’자에는 입[口]이 있고, 듣는 것을 뜻하는 ‘聞(문)’자에는 귀[耳]가 있다. 아는 자는 말하지만 듣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알지만 말하지 않고, 아는 것을 넘어서 들을 줄 알면 성인(聖人)이다.

2. 공자는 언제부터 성인이었나

그러면 한 가지 물음을 더 던져보자. 공자는 언제부터 성인이었을까? 본디 성인은 공자 같은 평민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덕이 높은 제왕, 곧 성왕(聖王)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예컨대 요․순․우․탕․문․무․주공 등이 유가에서 말하는 성인이다. 이 중 주공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대의 제왕이다.

일찍이 장자는 유가를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문으로 규정했는데, 내성외왕이란 내면의 덕을 기준으로 말하면 성인이고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왕위를 차지한 자라는 뜻이다. 사실 요임금에서 시작하여 순·우·탕·문·무를 성인으로 칭송하는 유가(儒家)는 스스로 왕이 되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였다.

그런데 공자는 스스로 ‘내성외왕’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고 대신 주공을 꿈에 자주 볼 정도로 흠모했다. 그 이유는 주공이 훌륭한 통치자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제왕이 아니면서 제왕이었던 자신의 조카를 보좌하여 천하를 다스렸다는 점에서 공자가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왕조라는 하드웨어를 구축하기 위한 무력 수단을 가지지 않은 공자가 스스로 왕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때문에 공자는 주공 같은 위치에 오름으로서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공자뿐만 아니라 후세의 모든 유학자들이 바란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 내성외왕의 성왕(聖王)이 될 수 없는 유가지식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현실의 군왕[外王]을 성인[內聖]으로 만드는 길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성인이 될 수 있는가. 글자를 기준으로 하면 聖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다. 聖자는 귀를 나타내는 耳자와 입을 나타내는 口자, 그리고 壬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壬자는 人자가 변형된 것으로 본디 사람을 뜻하는 글자이다. 갑골문의 聖자는 귀가 큰 사람(耳+人)이 입(口) 옆에 서 있는 모양이다. 따라서 聖은 큰 귀를 강조한 글자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다. 그런데 입을 나타내는 口자가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보면 聖은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잘 듣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 그까짓 게 뭐 대단하다고 성인이라 하느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틀린 이야기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옳은 말, 훌륭한 말, 아름다운 말, 자신과 견해가 같은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른 말, 평범한 말, 듣기에 괴로운 말, 자신과 견해가 다른 말을 잘 듣는다는 뜻이다. 그저 잘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참으로 어렵다. 미국 뉴욕의 어느 빈민가에 고등학교가 들어서고 난 뒤 마약 굴에 지나지 않았던 그 곳에서 의사, 변호사, 교육자 같은 이들이 배출되었다. 성공적인 교육을 이룬 선생님의 말씀은 이랬다.

“나는 단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을 뿐입니다.”

유가에서 성인으로 떠받드는 순임금도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 사람이다. 『중용』에 이르길 순임금은 ‘호찰이언(好察邇言)’ 곧 ‘이언(邇言)을 잘 들었다’고 했다. 여기서 이언(邇言)이 바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또 察자의 옛글자는 본디 아래에 示자 대신 言자가 있었다. 察은 말을 잘 듣는 것을 뜻한다. 『논어』에는 ‘찰언관색(察言觀色)’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관색(觀色)’은 얼굴색을 살핀다는 뜻이고 ‘찰언(察言)’은 말을 잘 살펴 듣는다는 뜻이다. 순임금이 순임금이 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성자의 조건을 기준으로 공자가 언제부터 성인이었는지 따져본다면 아무래도 60세부터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공자는 스스로 육십에 ‘이순(耳順)’했노라고 말했다. 이순은 ‘귀가 순해졌다’는 뜻이다. 耳자야 귀의 모양을 그대로 그린 상형문자이니 설명할 것도 없고, 順자는 시내를 뜻하는 川자와 사람의 머리를 뜻하는 頁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순’자는 물이 흐르는 냇가에 사람이 서 있는 모양으로 물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는 모양이다. 그래서 거스르지 않고 따른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렇다면 이순은 아무리 하찮은 말이라도 마음에 거슬림 없이 잘 들어주었다는 뜻이다. 성자의 조건에 꼭 맞는다.

3. 성자와 현자의 차이

공자는 50세에 천명을 알았다고 했지만 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성자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이처럼 지천명한 단계에 이른 사람을 현자(賢者)라 한다. ‘聖’자가 귀를 강조한 글자라면 ‘賢’자는 눈을 강조한 글자다. ‘賢’자에서 ‘臣’자와 ‘又’자는 발음을 나타내는 요소인데 이 요소가 포함된 글자를 ‘현’ 또는 ‘견’으로 읽으라는 표시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貝’자는 본디 ‘目’자로 눈을 그린 상형문자다. 따라서 ‘현’은 눈이 밝은 사람, 곧 작은 일도 잘 살피는 사람이다. ‘현’은 그래서 앞에 나온 ‘도와 덕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현’을 ‘덕을 가진 자[有德者]’로 풀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현’은 ‘성’과 짝을 이루어 ‘성현(聖賢)’이라는 말로 쓰이지만 때로 ‘능’과 짝을 이루어 ‘현능(賢能)’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이 경우 ‘현’은 ‘덕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고 ‘능’은 ‘힘이 센 사람’을 가리킨다. ‘능(能)’자는 본디 곰을 그린 상형문자이다. 자세히 보면 곰이 네 발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옆에서 그린 글자임을 알 수 있다. 곰은 힘이 세기 때문에 곰을 그린 ‘능’자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능’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의미하게 된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능’과 비슷한 글자이면서 ‘능’자와 짝을 이루는 글자로 ‘才’자가 있다. ‘才’는 ‘능’과 달리 ‘잠재력’을 의미한다. ‘才’자에서 ‘一’은 지표면을 그린 것이고 세로획 ‘丨(곤)’과 삐침 ‘丿(별)’은 식물의 싹이 아직 땅 아래에 있는 모양을 그린 것이다. 조만간 지표면을 뚫고 올라오겠지만 아직은 땅 밑에 있는 상태의 능력이다. 그래서 ‘才’자는 ‘겨우’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처럼 ‘聖’, ‘賢’, ‘能’, ‘才’는 모두 사람이 가진 훌륭한 능력, 또는 그런 사람을 뜻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은 말할 것도 없이 ‘성’이다. 여타의 능력은 분야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발휘하는 힘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그런데 ‘성’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타인에게 귀 기울인다. 자기를 낮추고 감추며 상대를 드러내주는 자기희생적인 능력이다. 바로 이것이 여타의 능력에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아무래도 ‘능’이나 ‘재’가 우대 받는다. 지금 이 나라 현실은 더더욱 그렇다. ‘성’은 말할 것도 없고 ‘현’ 같은 능력조차 오히려 수동적이고 무능한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 그런 사람을 ‘바보’라고 한다. ‘바보 김수환’이라느니 ‘바보 노무현’이라느니 하는 말은 이렇게 생겨났다. 손자병법 식으로 말하면 세상에서 승자가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면 승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바보’들은 강자의 말보다는 약자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 그리고 약자의 말을 지키기 위해 강자에게 맞선다. 심지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기도 한다. 손자가 보면 어리석다 하겠지만 그 어리석음이야말로 그들을 그들답게 만드는 가장 소중한 능력이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강약의 논리를 넘어선다.

4. 국민한테 성자가 되라는 나라

이 나라에는 걸핏하면 국민들이 자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허튼 소리를 해대는 최고 권력자가 있다. 그는 문제가 발생하면 늘 소통부족으로 원인을 떠넘기지만 그가 토론에 나오는 일은 결코 없다. 게다가 쌍방향 매체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이 나라의 수준을 무시하고 라디오방송에 나와서 일방적으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들어간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생각을 알자는 게 아니라 자기 말을 듣고 따르는 일방적인 복종체계임이 틀림없다. 그러니 이런 자가 가장 좋아할 법한 글자를 들라치면 아마도 ‘명(命)’자나 ‘령(令)’자일 것이다.

‘命’자는 두 개의 입이 위아래에 있는 모양인 ‘合(합)’자에다, 사람이 엎드려 있는 모양인 ‘卩(병부절)’을 그린 글자이다. 또 ‘令’자는 ‘命’자에서 아래에 있는 ‘입[口]’을 빼낸 글자로 명과 거의 같은 글자인데 실제로 갑골문에서는 ‘命’과 ‘令’이 같은 글자이다. 이 두 글자는 모두 위에 있는 사람이 말을 하면 아랫사람이 그 입 아래에 설설 기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을 그린 글자이다. 통치자가 말만 하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설설 기면서 복종하니 독재가 따로 없다.

어떤 권력자가 독재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독재(獨裁)’란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고 ‘혼자서 판단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재자의 귀는 늘 닫혀 있다. 미네르바를 잡아가고 광장을 폐쇄하는 이 나라의 권력자는 그런 점에서 독재자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늘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10년 동안 최소한 할 말은 마음껏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의 독재적 상황을 역설적으로 깨우쳐준다. 권력자가 자기 귀는 닫고 국민의 귀만 열자고 수작을 부리니 국민 모두가 성자가 되라 강요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 독재자에게 어울리는 글자가 또 있다. ‘逆(역)자’이다. 본래 길을 나타내는 ‘辶(착)’자는 ‘천천히 걸어간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逆’이 되면 거꾸로 간다는 뜻이 된다. 역주행인 셈이다.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강요함으로써 독재자는 민주주의를 등 뒤에 두고 거꾸로 달려간다. 시민 광장조차 꽁꽁 닫아걸고 있는 권력자에게 닫힌 귀를 열라 어찌 일깨운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