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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12척 가지고 싸우기 - 소설가 김훈에게 당부함
김정란 (상지대 문화컨텐츠학과 교수)
나는 깊이 절망하고 있다.
사실 이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절망은 한반도에서의 삶이 입고 있기를 명령하는 벗을 수 없는 어떤 옷처럼 느껴진다.
70년대 말, 유신의 광폭한 유령이 우리의 혀를 칭칭 묶어 놓았을 때, 누가 희망을 꿈꾸었을까. 그때 그 시커먼 막장을 빡빡 기면서, 우리는 빛이라는 게 있기나 한 것일까, 라고 절망했었다. 그렇게 많은 반대자들이 잡혀가고, 고문당하고 몸에 불을 지르고 죽었다.
그들이 그렇게 죽어갔던 이유는 결국 <말의 자유>를 위해서였다. 가치를 배열하는 기제인 말, 그 말의 자유를 확보하는 일은 결국 사상의 자유, 행동의 자유, 존재의 자기 결정권을 확보하는 일로 이어진다.
박정희는 긴급조치로 국민의 혀를 묶었다. 그 시절에 말은 단 하나, 박정희의 말 뿐이었다. 시키는대로 말하지 않는 자, 불러주는대로 받아쓰지 않는 자는 빨갱이의 누명을 쓰고 죽어야 했다. “빨갱이들은 말이 많다”라는 항간의 속설은 결국 빨갱이란 “시키는대로 말하지 않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그 수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왔던 세력은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은 커녕 오히려 점점더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끔찍한 거짓의 악순환.
그들은 “정통성”을 거론하며 민주화를 위해 매진했던 세력을 여전히 “불순 세력”으로 몰아붙인다. 그들은 지난 수십 년간 독재정권과 결탁하여 확보한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 각분야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지역감정을 이용하여 민중의 각성을 유예시키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교묘한 방식으로 유지시키고 있다. 이 거짓의 악순환이 가능한 이유는 이 세력이 가치창출의 매체인 언어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있는 그자체로 순결하지도 불순하지도 않다. 그것은 매우 임의적인 기호에 불과하다. 그것은 영혼의 특질과 똑같다. 신화는 영혼의 여정을 천국과 지옥 양쪽에 배치한다. 그것은 영혼이 그 주인의 모색의 성격에 따라 고결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추악한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영혼의 구조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결코 가치를 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천사의 가치를 실어나를 수도 있고 악마의 가치를 실어나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인간은 언어의 회로를 통하지 않고 어떤 가치도 창출해낼 수 없다.
언어가 수행하는 일은 영혼의 여정처럼 양쪽 극단으로 크게 움직인다. 한쪽 끝에 신과의 합일이라는 신비주의적 존재론의 플랜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 끝에는 악마적이고 수준낮은 선동이 있다. 한 사회가 병들었을 때, 그 병의 양상은 언어의 병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진실이 힘을 가지는 사회는 건강하다. 그러나 거짓이 힘을 가지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아무도 진실을 구하지 않는다.
진실을 구해봐야 신세만 고달파지고, “바보”소리나 듣게 마련이다. 풍찬노숙하며, 가정까지 희생시키며 독립운동을 했던 자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떠밀리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제국주의자들에게 협력했던 자들은 자신도 편하게 잘 먹고 잘 살았을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많은 재산을 물려주었다. 그뿐인가, 18년 씩 폭압정치를 했어도 대한민국에서 단군 이래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힌다.
우리 사회의 말은 깊이 병들어 있다. 그러나 말을 통해 어떻게 한 사회의 가치가 배열되는지 감시해야 할 말의 최전방에 서있는 시인들과 작가들은 완강하게 입을 다물고 있다.
비틀린 언어가 계속 재생산되는 악순환의 고리 한가운데에 거대자본화되어 있는 거대언론이 있다. 특히 조선일보가 있다. 그들은 친일의 경력부터 시작해서 독재정권에의 적극적 협력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공동체적 가치창출을 배반하는 방식으로 움직여 왔을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자신들이 지지하는 한줌의 기득권 세력의 힘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그 동안 갈고닦은 세련된 포장기술로 대중을 속여넘기고 있다.
그러나 시인들과 작가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입을 다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년 전부터 시민들이 자기 희생을 감수하며 애쓰고 있는 반조선일보 운동을 흘겨보고, 불편해 하며, 또 혹자는 오히려 조선일보를 적극적으로 나서서 돕기까지 한다.
언론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일까? 그래서 문학은 그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되는 것일까? 나는 문학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소위 <문학주의>라는 입장이 실은 뒤집힌 정치적 입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이미 강력한 상징적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일체의 기득권을 강화시켜주는 일에 협조한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문학주의>란, 60년대 순수/참여 논쟁만큼이나 공허하고 무책임하며, 그들이 겉으로 아무리 중립성을 표방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기득권의 손을 들어주는 행태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60년대의 우스꽝스러운 순수문학 이데올로기를 재탕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론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에 불과하지 않다. 그것은 대단히 문학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어 시스템의 문제이며, 한 사회의 상징 유통 시스템에 관한 문제이며, 문학이 언어를 통해 생성시켜 온 인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올바로 된 역사의식이 있는 언론이 강한 상징 생성 기제를 확보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박정희같은 희대의 기회주의자를 단군 이래 최고의 인물로 여기는 기막힌 상황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가치의 전도는 언어의 비틀림을 통해 가능해진다.
작가와 시인은 언어를 통해 존재를 구축하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말의 의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이 병들었을 때, 그들은 병든 말에게 문학이라는 치료약을 투여한다. 때로는 <해체>의 형식으로 대대적 수술을 감행하기도 한다.
서구에서 낭만주의자들, 상징주의자들, 초현실주의자들이 했던 일들이 그런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70~80년대에 이런 말의 대수술은 활발하게 이루어졌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말의 의사들이 일제히 침묵에 들어갔다.
말들은 길바닥에 버려져 푹푹 썩고 있다. 존재 창출의 매체인 언어가 거짓에 덜미가 잡혀 생명의 기능을 잊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김훈이 {칼의 노래}에서 시신들이 썩는 장면으로 작품을 시작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군국주의자는 말들이 썩은 곳에서 비로소 자신의 확고한 문학적 지분이 생성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인식이 썩은 곳에, 말이 인식적ㆍ명사적 요소를 포기한 곳에, 뭐가 뭔지 모르게 가치들을 뭉개버린 곳에 김훈의 과다한 형용사적 문학이 자리잡는다. 남성적 힘을 숭상하는 이 작가의 무책임한 허무주의는 말이 생성시켜야 할 인식의 죽음 위에 위치를 설정한다. 그런데 그의 허무주의는 니체의 모델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는 결코 세상과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서정주 모델을 따라간다. 비판받으면, “애비는 종이었다”고 도망치면 그만이다. 김훈은 좀더 퇴폐적인 포즈로 말한다. “난 잡놈이야.” 그 말은 내게 책임을 묻지 말라는 뜻이다. 그 그럴듯한 포즈는 많은 것을 버린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그런데... 그가 무엇을 버렸는가? 그가 그리는 기만적인 탈주의 선은 영토 바깥이 아니라, 영토 안쪽으로 그어진다. 그는 아무것도 버린 것이 없다. 그는 재영토화를 탈영토화인 것처럼 속이고 있다.
김훈은 김훈의 세계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훈이 마음껏 떠들 수 있는 바탕은 12척 배를 가지고 싸우러 나갔던 “무지한” 자들이 만들어준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나가 싸우는 자들을 능멸하지는 말라. 물질과 힘을 지극히 숭앙하는 듯한 김훈의 이상한 형태의 허무주의 세계관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각자의 세계관은 각자가 선택할 몫이므로 나는 그 선택을 존중한다.
그러나 힘겹게 애쓰는 자들을 능멸하지는 말라. 능멸하지 않아도 김훈이 지지하는 대한민국 기득권 세력의 “물적 토대”는 상당히 오랜 기간 유지될 것이다. 기득권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물적 토대”와 그 반대자들의 “물적 토대”의 차이는 배 12척과 120척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그 차이는 이순신의 거북선과 미국의 항공모함 정도의 차이이다. 따라서 이순신의 배 12척을 가지고 설치는 “무지한” 자들은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가난하고 외로울 것이다. 손가락질 당하고 얻는 것도 없고 욕만 바가지로 먹을 것이다. 따라서, 양지에 앉아서 그들을 손가락질 하는 일은 멈추기 바란다.
그것이 적어도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가 아니겠는가.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적어도 배 12척을 가지고 나가 싸워 이겼고 영광스럽게 승리했던 이순신을 자신의 문학적 주인공으로 내세워 명예를 얻은 작가라면 그래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문학이 진실의 곁에 있지 않을 때, 아니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 진실하려고 애쓰는 인간적 태도를 높이 평가하려는 태도를 경멸할 때, 나는 자문한다. 문학은 무엇일까? 더욱이 시는 무엇일까? 대체 이런 사회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아직 의미가 있는 일일까?
그러나 다행히, 마음속의 열망은 아직 불씨가 다 꺼지지는 않았다. 아직은 걸어갈 힘이 남아있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볼 생각이다. 모두 평안하시길....
<서정과 현실>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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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12척 가지고 싸우기 - 소설가 김훈에게 당부함/김정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