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희(2005-01-23 00:36:10, Hit : 2004, Vote : 360
  퇴계의 삶과 철학1




이우위설을 주창한 이퇴계와 이기일원론적 철학사상을 주창한 나정암은
정-주이후 이학파와 기학파로 나뉘어 대립한
성리학사를 정리하고 완결짓는 역할을 하게된다.


양자가 이론상 대립함에도 불구하고 정주학을 기반으로
이 둘은 노,불을 배격하고 육왕학파를 비판하고 있다.




퇴계가 성리학을 공부하고 있을 시기에는 정주학과 육왕학이 고루 수용 비판 논의되었다고 보여지나, 퇴계에 의해 동양의 성리학의 면모가 완결지어져가던 무렵에는 .....퇴계(거의 나정암이나 왕양명은 동시대사람이다)가 왕양명에대한 비판서를 쓰고 난후의 조선후기는 이 양명학이 불교나 도가와 마찬가지로 (주자의 이론에 반하는)이단으로 몰리면서.... 잠수를 탔다가(사화를 겪고)..... 윤후, 박제가, 박세당, 정제두 등의 북인 이나 서인계열들의 개혁 사상의 사상적 바탕이 되고 이후 서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중인중심의 신흥 개혁 유학자 그리고 전면적인 현실개혁적인 동학이론에도 영향을 주게된다. 물론 양명학은 이후에도 성리학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유가사상의 맥락을 잇는 또 다른 성리학(신유학)의 계승자로서 혹은 개혁자로서 ..... 나아가 국학운동(정인보 박은식) 서구의 학문과 천주교(정제두계열의)나 기독교(무교회주의의 유영모나 함석헌) 를 수용할 수있는 유학의 내재적인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퇴계 철학의 구인성성론과 이기이원론적 특성



1)퇴계철학의 본령으로서 구인성성과 위기지학



사실상 퇴계는 인심과 도심, 천리와 인욕을 엄격히 구분하고, 이와 기의 혼동을 경계하는 이원론적 사상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존천리 알인욕'(천리를 간직하고 인욕을 제거한다/삼가한다)을 위한 '존양성찰론'은 <심경>의 핵심이자 이것이 바로 이 것이 퇴계의 이원적 사고의 유래인 셈이다.성리학의 이론적인 면에서 이기불상리 그리고 특히나 이기불상잡의 원리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물론 퇴계가 처한 그 당시의 현실속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사화기의 혼란속에서 즉 사림파와 훈구파의 정치적 충돌의 시기지만, 단순히 정치권력의 다툼을 넘어서 특권층의 소인배가 군자유를 탄압하던 시기에서)시비와 정사가 바로잡히지 않은 사회적 부조리를 목도하면서 .... 인간의 본래성을 회복하여 상실된 참된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신념과 가치의 표현이다. 퇴계는 정주학의 이론적 천착에 주력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완성이라는 구인성성의 인간학적인 문제에 향해져 있다.

퇴계는 자신에 대한 내면적 성찰을 무엇보다 강조하였으며, 진적력구(眞積力久)의 노력을 주요시하였다. 그런의미에서 퇴계사상은 구인성성을 실천적으로 뒷받침하는 경의 철학, 이존적 이기이원론, 주리론, 순수의리지학이라 할수 있고, 도덕적인 가치의 형이상학이라 볼 수도 있다.


이理를 절대시하는 퇴계는 이발, 이동, 이도설을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주자와 구별되는 점이다.



주자는 이기를 사실적 차원과 논리적 차원에서 불리, 부잡을 동시에 말하였고,
이理는 어디까지나 무형무위한 것이므로 유형유위한 기氣와는 다른 것이었다.

퇴계의 이기론은 근본적으로 정주의 학설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정주와는 다른 점이 있다.
퇴계는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서 분명한 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자신의 관점에서 정주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전개하고 있다.

퇴계자신이 스스로 주리 주기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며, 그러한 논리에서 보면 그는 주리론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 우위설의 배후에는 궁극적으로 인간 고유의 가치와 인간다움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추구라는 학문적 목표가 있었다.


인간다움이란 인체仁(人)體(사랑의 본체/바탕/몸뚱이)라고도 할 수 있다.
퇴계의 인간학은 구인(사랑을 추구하는)이라는 종신사업(죽을때까지 임해야 하는 일)이며,
구인은 성자(성인)를희구하여 자신을 성장 성숙시키는 끝없는 도정이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지의 문제나 행의 문제에 있어서 진적력구의 노력이 요망되는 것이며, 공자가 위인유기爲人 由己(사랑은 자신에서 비롯된다)라 하였듯이 자기자신의 자각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누가 시켜서 될 일도 아니다. 이는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끊임없는 노력에서 생기는 것인데 이를 위기지학이라 한다.



그러므로 퇴계의철학을 구인성성의 위기지학이라 하는 것이다.


퇴계의 구인성성(求仁成聖)의 학문은 성학聖學으로 집약된다.
성학은 성자의 인격을 배우는 것이며 성왕의 덕치를 배우는 것이다.
진리는 인간주체를 떠나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 속에 본래성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퇴계는 우주론적 탐색보다는 인간의 주체적 진실성을 더 긴요하게 여겼으며, 거기서 인간의 존엄성을 확인하였다. 성학(성자가 되는 배움)은 사랑(인)을 구하는 것이라 퇴계는 말한다.



본래 정주학에서는 인人을 성性이라 하고 성性은 이理라하여
마치 척발하여 추상화시킴으로써 인간 심성의 정의적, 의지적 사실로부터 유리된 것 같지만,
실은 이론적 해명일뿐이요 그런 것은 아니다.

인仁(사랑)은 객관적으로 대상화해서는 안전히(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아마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퇴계는 인仁에 대하여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체인하는 것을 강조한다. 즉 그저 대상적으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체득할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주자는< 인설>에서 '인을 마음의 덕(심지덕), 사랑의 길/이치(애지리)'로 해석하였다.
또 '천지가 물을 낳는 마음으로 사람이 그것을 얻어 마음으로 삼은 것'이며, '천지에 있어서는 온연히 (따뜻하고 자연스럽게편안히) 사람을 사랑하고 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 하였으며, 인도仁道(사랑의 참뜻 /참된 사랑/사랑의 길)는 '천지가 물을 낳는 마음이 물에 즉하여 있는 것으로서 정情이 발하지 아니했을 때 이 본체가 이미 갖추어져 있고, 정이 이미 발하여서는 그 쓰임이 다함이 없으니, 진실로 체득하여 보존할 수 있으면, 모든 무리의 선함의 근원과 모든 일의 근본이 여기에 있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공자 문하의 가르침이 배우는 자로 하여금 인(사랑)을 구하는 데 급급하게 하는 까닭이다.'라고 했으니 사랑이 넓고도 깊고 오묘한 것이라 이해하기 힘들다는 ...


이理나 성性이 추상화된 개념이라 한다면, 사랑(인)은 마음의 덕으로서 인간의 구체적인 정의적 의지적 사실을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심덕의 성취를 통하여 인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애인이물지심)으로 흐르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구인求仁(사랑을 구하는)의 역정을 통하여 인격주체는 이理와 심心이 상호매개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퇴계의 말로는 이발理發(이가 나오는)이요, 이도理到(이가 도달하는)이다.


퇴계는 장재의 <서명>에 대한 해석서인 <서명 고증강의>에서...


" 대체로 횡거(장횡거:장재)의 이 명銘<서명>은 거듭 풀이하여, 나와 천지만물의 이치가 본래 하나인 까닭을 미루어 밝힌 것이다. 인체仁體(사랑의 본체)를 그려내고 그로써 유아의 사심을 깨뜨리고 무아의 공심公心(한마음)을 크게 열어 주어, 그 완고하기가 돌과 같은 마음으로 하여금 융화하여 환히 트이게 하고 남과 나 사이에 간격이 없게 해서, 조그마한 사심도 그 사이에 용납함이 없게 하였으니, 천지만물이 한 집안이 되고 온 나라가 한 사람처럼 되어서, 남의 괴로움과 아픔을 내 몸에 절실히 느껴서 인도仁道(참사랑/사랑의 이치/길)를 얻을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정완(訂頑- 고집된 자아(사아)의 병고를 바로잡는다)이라 이름하였으니, 그 완고함을 고쳐서 선(동하고 정하는 우주원리에 조화하는)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나와 천지만물의 이치는 본래 하나이다.
인체(사랑의 마음/본체)는 나와 천지만물이 본래 일리(하나)라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인체仁體란 인간고유의 본래성性이며 인체의 회복이 공아公我(우리)이다.
유아지사를 극복하여 무아지공을 회복함으로써 인체는 노정될 수 있다.
공아(한마음)를 회복하면 일호(한 터럭의)의 사의(私意)도 없게 되어 물아무간(사물과나와의 간격이 없다-물과도 하나이다)의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나와 천지만물은 혼연일체가 된다.

그러한 일체감에서 (우리라는 한마음 한우주 모든 만물과일체에서)
병들어 아파하는 사람을 보면 곧 내 몸이 아픈듯이 느끼게 된다.



퇴계는 장재의<서명>을 통해서
이일만을 말하고 분수를 말하지 않으면,
관념화 추상화되어 맹목으로 흐르기 쉽고,
분수만을 말하고 이일을 말하지 않으면
현실에 매몰될 수 있다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일과 분수를 동시에 말함으로써
겸애兼愛(묵자의 아낌없이 주는 모든 걸 내어주는 우리와 나가 애초에 구분되지 않는 모두가 공아)
위아爲我(순자의 유물론적 성악설에 기반한 남과 구별되는 사아 즉 개인의 신체를 기반으로 한 자기자신) 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나의 심성안에서 인체(인체)를 체득하여 측은지심으로 구현해야 함을 강조한다. 퇴계가 경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인체를 구현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존양성찰을 통하여 인체仁體를 체인體認함으로써 측은지심으로 노정시키는 것이다.측은지심은 천지를 일가로(한가족) 하나의 조화된 나라를 일인(한 사람)으로 여겨, 나와 남이 하나(우리)가 되어 남의 아픔과 슬픔이 곧 나의 아픔과 슬픔으로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

마음은 천리를 머금고 있으며, 마음은 천리가 드러나는 실처인 한에서 , 인간을 뛰어넘어 무엇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은 세간사를 주재할 수 있는 인격주체를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확립된 인격적 주체를 퇴계는 인극人極이라 하였다.



"마음(心)이 태극太極이라 함은 이른바 인극人極 이라는 것이다.
이 이理는 남과 나, 바깥과 안이 없고, 나뉨도 없고, 장소와 형체도 없다.
고요할 때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으니, 하나의 근본이 되어 마음에 있다거나, 사물에 있다거나 하는 구분이 없다.
움직여 사물에 응할 때는 사물의 이理가 곧 내 마음의 이理이다.
다만 마음이 주재가 되어 그 법칙에 따라 응할 뿐이니, 어찌 내 마음으로부터 끌어낸 뒤에야 사물의 이가 된다고 하겠는가?"







주염계의 태극도설( 퇴계의 성학십도 중의 첫번째 부분... 제1 태극도설))

주자역시도 주돈이(염계)의 이 태극도을 가지고 이에 해석(그래서 태극도설인 셈)을 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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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의 성학십도에서의





▶ 태극도설 설명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동(動)하여 "양(陽)"을 낳는데, 동의 상태가 지극하면 정(靜)하여지고,정하여지면 "음(陰)" 을 낳는다.

정의 상태가 지극하면 다시 동하게 된다.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하는 것이 서로 그 뿌리가 되어,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양의(兩儀)" 가 맞선다.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를 낳는데, 이 다섯 가지 기(五氣)가 순차로 퍼지어 네 계절(四時)이 돌아가게 된다.

"오행" 은 하나의 "음양" 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 이며 태극은 본래 "무극" 이다.

오행의 생성시에 각각 그 성(性)을 하나씩 가져서, "무극의 진(眞)과 이(二), 오(五)의 정(精)"이 묘하게 합하여 응결되면 "건도(乾道)"는 남성을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성을 이룬다. 두 가지 기(二氣)가 서로 감화하여 만물을 낳고, 만물이 계속 생성함으로써 "변화"가 무궁하게 된다.

오직 인간만이 그 빼어난 것을 얻어 가장 영특하다. 형체(形)가 이미 생기자 정신(神)이 지(知)를 발하고, 오성(五性)이 감동하매 "선악"이 나뉘고 "만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에 성인이 "중정(中正)"과 "인의(人義)"로써 이것을 정하고, 정을 주로 하여 "인극(人極)"을 세웠다. 그러한 까닭에 "성인(聖人)"은 그 덕성이 천지와 합치하고, 그 밝음이 일월과 합치하며, 그 질서가 네 계절과 합치하고, 그 길흉이 귀신과 합치한다. 군자는 이것을 닦으므로 길하게 되고, 소인은 이것을 어기므로 흉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늘의 도를 세워 음과 양이라 하고, 땅의 도를 세워 유(柔)와 강(剛)이라 하며, 사람의 도를 세워 인과 의라 한다"고 하며, 또 이르기를 "원시반종(原始反終)하면 사생(死生)의 설(說)을 안다"고 한 것이니, 위대하도다 '역(易)'이여! 이것이야말로 그 지극한 것이로다.

주자가 말했습니다.
도설(圖說)의 머리 부분에서는 음양에 의한 변화의 근원을 말하였고, 그 다음으로는 곧 인간의 타고난 것을 밝혔다. 여기 "오직 인간만이 그 빼어난 것을 얻어서 가장 영특하다" 한 것은 순수하고 지극히 선한 성(性)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태극이다.

"형체가 생기자 정신이 발하였다"는 것은 음이 동하고 음이 정하여 이루는 것이다.

"다섯 가지 성(五性)이 감동한다" 함은 양과 음이 변하고 합하여 수, 화, 목, 금, 토의 성을 낳는 것을 말한다.

"선악이 나누인다"는 것은 만물이 화생하는 상(象)이다.

"성인이 중정(中正), 인의(仁義)로 정(靜)하고, 정을 주로 하여 인극(人極)을 세웠다" 한 것에 이르러서는, 태극의 전체를 얻어서 천지와 더불어 간격없게 합치토록 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 아래 글에서 다시 천지, 일월, 사시, 귀신이라는 네 가지와 합치되지 않음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주자는 또 말하였다.
성인은 힘써 닦지 않아도 저절로 된다.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여 몸을 닦는 것은 곧 군자가 길하게 되는 까닭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 도리를 거스르는 것은 소인이 흉하게 되는 까닭이다.

닦는 것과 거스르는 것은 역시 "경(敬)"과 "사(肆)"의 차이에 있을 뿐이다. 경의 태도를 가지면 욕심이 적어지고 사리는 밝아진다. 욕심을 적게 하고 또 적게 하여 아예 없게 하면, 정할 때에는 허하고 동할 때에는 곧게 나아가게 되어 성인을 배울 수 있다.




위의 것은 염계 주자가 스스로 만든 '도'와 '설'입니다.

평암(平巖)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이 그림은 [계사(繫辭)]에서 '역(易)에 태극이 있었다.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았다'고 한 뜻을 미루어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역]에서는 괘효(卦爻)를 가지고 말하였는데, 이 그림에서는 조화(造化)를 가지고 말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도리의 큰 두뇌가 되는 것이며 백세 도술의 연원이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이 그림을 머리에 내세우는 것은 역시 [근사록(近思錄)]에서 이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첫머리에 둔 의도와 같은 것입니다.


무릇 성인을 배우는 사람은 근본을 여기서부터 실마리를 찾아 [소학], [대학] 등에 힘을 기울이다가 그 보람을 거두는 때에 이르러 하나의 근원을 끝가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이것이 이른바 "이(理)를 궁구하고 성(性)을 다하여 명(命)에 이른다"는 것이고, 이른바 "신묘(神)를 다하고 조화를 알아서 덕이 성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




주자는 태극을 이理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만약 심을 태극이라고 한다면 논리상 맞지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퇴계의 문인 우경선이 마음이 태극이라 한 말에 대해 의심을 갖고 퇴계에게 물었다.

'본연지성이 아직 발하지 않은 처음을 태극이라 해야 할 것인데, 마음을 태극이라 하는 것은 마음이 성성과 정정을 통섭하는 까닭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가'하는 것이었다.

이에 퇴계는

" 마음이 고요할 때는 태극의 체가 갖추어져 있고,
마음이 움직일 때는 태극의 용이 행해지기 때문에
마음이 태극이라고 한 것이다"


퇴계가 마음이 태극이라 함은 우주론적 태극, 이기의 문제를
인간학적 심성의 차원에서 인극의 문제로 압축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퇴계는 진리란 이론적 탐구만이 아니라
체인과 체험을 바탕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퇴계는 학문에 있어 체인과 체험을 강조하는 바, 자신의 내면적 성찰과 진적력구의 노력을 통하여 진리를 발견하고 이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퇴계의 학문은 궁극적으로 성자를 지향하여 나아가는 이론이며, 이는 참된 자아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퇴계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실상은 그의 자성록에서 잘 나타난다.
퇴계는 자성록의 소서 첫머리에 <논어>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공자의 언충신 행독경(말은 진실되고 믿음직스러워야 하며, 행동은 독실하고 공경스러워야 한다)을 강조하고 있다.

"옛적에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은 것은 몸으로 실천함이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했기 때문이다"

퇴계가 염원하는 것은 인仁(사랑-측은지심: 4단)을 구하여 성인이 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의 위기지학인 셈이다. 퇴계가 희구하였던 군자성인이란 ..... 군자란 인의 완성을 지향하여 발분노력하는 인간상을 말하고, 인을 완전히 실현한 인간의 극치가 성인인 셈이다.
참된 자아를 성취하려는 노력이 자기를 위한 공부이며 그러한 일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강탐과 안배의 습관을 버릴 것과 순서와 단계에 맞는 각고의 노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퇴계의 학문적 본령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 인간 존엄성의 극치를 이해하고 그것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데 있다.

허식에 힘쓰며 외물을 따라가 명성과 영예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데서 공부를 시작하여 심득궁행을 기약하는 것이 위기지학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마음으로 깊이 깨달아 몸소 실천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천리지학踐履之學(행함으로써 나날이 쌓아 새롭게 나아간다)인 것이다.

퇴계는 "다만 이 이치를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 어려운 것이며, 또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참을 쌓아 오래도록 힘쓰기가 더욱 어렵다"고 하였다. 다만 아는 데 그치거나 일시적 실행이 아니라, 지와 행의 진적력구의 역정을 통해 자기완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2) <심경부주>의 사상체계와 퇴계의 학문론




이황(퇴계)의 성학십도중.... 제8 심학도는
정복심의 심학도와 도설로 이황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심경>은 주자의 사숙문인인 진덕수가 <시><서> <역><논어><중용><대학><맹자><예기> 등의 경서와 주렴계의<통서>에서 심성에 관한 격언들을 채록하고, 그 이외에 정이천 범란계, 주화암(주희)의 잠과 명을 초록하여 편찬한 책이다. 여기에 명나라 헌종때 황돈 정민정이 주를 부가하여 <심경부주>라 하였다.

<심경부주>의 근본취지는 존양성찰存養省察을 통한 존천리 알인욕에 있다.

<심학도>는 상면의 심心권과 하면의 경敬권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심心은 일신(一身)의 주재(主宰)로서 허령, 지각, 신명을 갖추고 있는 것이며,
경敬은 일심(一心)의 주재(主宰)로서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며 무사무려의 고요한 상태이다.


<심경>은 심과 경의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정복심은 심권의 주변에 양심과 본심과, 적자심과 대인심, 인심과 도심을 대칭적으로 나열하고
경권에는 신독과 계구, 극복과 조존, 심재와 심사, 구방심과 양심, 정심과 진심, 사십부동심과 칠십이종심을 대칭적으로 나열하였다.

그리고 심권과 경권을 유정(유정, 유선), 유일(유일, 고집)로 연결하였다.
<심경>을 <심학도>의 구분대로 한다면 , 심권은 인간관을 경권은 수양권을 말하는 것이다.


도설에서 정복심은 <심학도>를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아직 인욕에 빠지지 않은 양심이요, 인심은 인욕에서 느껴진 것이요, , 대인심은 의리가 모두 갖추어진 본심이요, 도심은 의리에서 느껴진 것이니, 이것은 두 가지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형기에서 생기는 까닭에 인심이 없을 수 없고, 성명에서 근원하면 도심이 되는 것이니,

'정일택집이하'는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는 공부가 아닌 것이 없다.
'신독이하'는 인욕을 막기위한 공부이니, 반드시 부동심에 이른다면, 부귀가 분수에 넘치게 하지 못하고, 빈천이 옮기지 못하며, 위무가 굴복시킬 수 없게 되니, 가히 도가 밝혀지고 덕이 세워짐을 볼 수 있다.
'계구이하'는 천리를 보존하기 위한 공부이니, 반드시 종심에 이르게 되면, 심心이 곧 체體고, 하고자 함(欲)이 곧 용用이요, 체體가 도道요, 용用이 곧 의義요, 성聲이 율律이 되고, 신身이 도度가 된다. 생각하지 않아도 얻고,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게 됨을 볼 수 있다.

요컨대 공부하는 요점은 모두 경敬에서 떠나지 않는다. 대개 마음이란 것은 일신의 주재요 경은 또한 일심의 주재이다. 배우는 자가 주일무적(主一無適)의 설과 정제엄숙(整齊嚴肅)의 설, 그리고 그 마음을 수렴하여 늘 깨어 있다는 설을 깊이 연구하면, 그 공부함이 지극하여 넉넉히 성聖역에 들어가는 것 또한 어렵지 않을 것이다.





*****


이황의 성학십도에서의


▶ 심학도설 설명

적자(赤子)의 마음은 인욕(人慾)이 물들지 않은 양심이지만, 인심(人心)은 욕구에 눈뜬 것이다. 대인의 마음이란 의리가 다 갖추어진 본마음이고, 도심이란 곧 의리(義理)를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실은 형기에서 발생되면 모두 인심이 없을 수 없게 되고, 성명에 근원하면 도심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정일(精一)과 택집(擇執) 이하의 것은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게 하는 공부 아닌 것이 없다. 신독 이하의 것은 "인욕을 막는 점"에 관한 공부인데, 반드시 "부동심(不動心)"에까지 이르러야 부귀가 마음을 음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이 마음을 바꾸게 하지 못하며 위무(威武)가 마음을 꺽지 못하게 되어, 그 도가 밝아지고 덕이 세워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수 이하의 것은 "천리를 보존하는 점"에 관한 공부인데, 반드시 "종심(從心)"에까지 이르러야 심(心)이 곧 체(體)이고 욕(欲)이 곧 용(用)이며, 체(體)는 또한 도(道)이고 용(用)은 또한 의(義)의 관계를 가지면서, 언행이 법도에 맞아서, 생각하지 않고서도 이해하게 되고 힘쓰지 않고서도 절도에 맞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공부하는 요령은 어디까지나 한결같이 경의 태도로부터 떠나지 않는 것이다.

무릇 마음이란 "한 몸을 주재"하는 것이고, 경이란 또한 "한 마음을 주재"하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들이 "주일(主一) 무적(無敵)"의 설이라든가, "정제엄숙(整齊嚴肅)"의 설과 저 "마음을 수렴하고 항상 또렷한 정신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설을 깊이 궁구한다면 그 공부가 더할 나위 없게 되어, 성인의 경지에 충분히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퇴계의 비판적 해석(심학도의 근본적인 취지인 존천리 알인욕의 공부방식에 대한)


위의 것은 임은 정씨가 성현들이 심학을 논한 유명한 말씀들을 주워 모은 것입니다.
이 도를 만드는 데서는, 그 성현들의 말씀을 분류 대치시키기를 많이 하여 싫증을 느끼지 않도록 함으로써, 성학의 심법이 역시 일단에 그치지 않는 것이므로 전체에 다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위로부터 아래로 배열한 것은 다만 깊고 얕은 점과 생소하고 익숙한 점을 들어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이와 같다는 것일 뿐, 그 공부하는 과정에 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과 같이 선후의 절차가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의심하여, 이와 대체적으로 서술한 것이라면 "방심을 구함"이 공부에 있어 첫째의 일이므로 "심재(心在)"의 뒤에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이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방심을 구함"이란 얕은 정도로 말하면 진실로 제일 먼저 착수 입각해야 하는 점이지만, 깊은 정도로 지극하게 말한다면 순식간이라도 일념이 조금만 어그러지면 역시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안자 같은 분일지라도 3개월 이상이면 어기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어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곧 방의 상태에 들어선 것입니다. 다만 안자는 잘못 어그러져도 곧 그것을 알 수 있는데, 알면 곧 다시는 싹트지 않도록 하는 것이 역시 방심을 구하는 종류일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정씨도의 서술이 이와 같습니다. 정씨의 자는 자견(子見)인데 신안 사람입니다. 은거 생활을 하며 벼슬을 하지 않았고, 그 생실에는 의리에 맞는 점이 매우 많았습니다.

백발이 되어서는 경전의 연구에 깊은 이해가 있어 [사서장도] 3권을 지었습니다. 자견이 원하지 않아 곧 향군 박사로 되었다가 치사하고 돌아갔습니다. 그의 사람됨이 이와 같사오니, 어찌 일정한 견해 없이 함부로 지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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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을 온전히 보존하려면 반드시 먼저 대인심이 있어야 하고, 흩어진 마음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마음이 제자리에 있도록 해야 하고, 마음이 제자리에 있도록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기의 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가야 한다는 식으로 공부의 공정과 절차를 가지고 심학도를 이해하는 것을 반대한다.



오히려 퇴계는 공부를 함(몸과 마음을 씀) 의 차례대로 하나하나 앞뒤를 구분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한다.이 심학도는 심의 다양한 모습을 구분하여(심자 테두리에 놓인 여섯가지 심은 다만 성현들이 마음을 말한 것이고 각각 가르키는 바가 다를 뿐이다) 말한 것이므로 , 선후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라 이해한다.





본연지성은 양심이라 하고
본유지선을 본심이라 하고
순일하여 거짓됨이 없는 것을 적자심
순일하여 거짓됨이 없으면서도 온갖변화에 통달한 것을 대인심이라 하고
형기에서 나온 것을 인심이라 하고
성명에 근원한 것을 도심
다만 양심과 본심은 그 뜻과 유형이 비슷하므로 윗부분의 좌우에 대응배치한 것이고, 적자심, 대인심, 인심, 도심은 그 본래의 말이 서로 대응되므로 가운데 부분과 아랫부분 좌우에 배치한 것이라 하였다.





율곡의 이 둘(인심과 도심)을 퇴계가 상대적인 공부로 설명하는 있다고 하는 비판에 대해 이황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인욕을 막는 것과 천리를 보존하는 것을 상대되는 공부로 본 것은 숙헌叔獻(율곡)도 틀렸다고 하였는데, 그러나 이것을 상대되는 공부로 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진서산도 "사욕을 이기고 마음을 다스리고 보존하고 기르는 일(극치존양)은 상호작용하여 그 공효를 이른다"고 하였으니, 여기서 상대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어째서 안 되겠습니까? 그 공부는 정일(精一)에서 다했고(그외의 공부는 사실 필요없다는 말), 계구, 근독에서 또 치밀합니다. 공자가 인(사랑)을 하는 데 극기복례로써 한다는 말한 것과 맹자가 밤에 얻은 맑은 기운으로 마음을 잡아 보존한다고 논한 것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이런 몇 가지를 들어서 곧장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하는 것(종심) 과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부동심)으로 끝마치는 것이 어찌 꼭 이쪽 한 층을 말미암아 저쪽 한층을 올라가고 또 저 한 층을 사다리나 계단으로 삼아 그 위 몇째층을 오른다고 말한 것이겠습니까? 대체로 생각하기를 , 성현들이 심법을 논한 곳은 한 가지가 아니니, 혹은 이러하다고 여기기도 하고 혹은 저러하다고 하여 두루 가리켜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서, 모두 알지 않아서는 안 된다거나 모두 공력을 쏟아야 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 위로부터 아래로 배치한 것도 또한 도를 만든 형세상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 <대학> 8조목의 공정에 선후가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퇴계는 <심학도>를 심학의 묘를 다했고 심학의 요점을 밝힌 것으로 이해하고
또한 <심경부주>에 상당한 신뢰를 갖고 있었다.

<심경>은 존덕성과 도문학의 두 측면을 겸하는, 즉 내외를 겸하는 학문론에 근본적인 입장을 두면서도 존양성찰이라는 존덕성의 과제에 치중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구인성성(인을 찾아내고 성인을 이룬다)을 퇴계의 학문적 과제였다고 본다면, 이 <심경부주>는 퇴계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절실하고 무엇보다 유용한 책이엇을 것이다.


인간의 행위에 있어 도덕적 표준과 잣대 와 그 준극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퇴계에게는 절실한 문제의식이었고, 인간은 자만하거나 자처하지 말아야 하며, 항상 겸손한 태도로 진적력구의 실천적 노력을 지속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서경>의 홍범의 황극의도를 예롤 들면서, 사사로움을 이기고 공정함읋 회복해야 함을 역설하였는데, 이 황극의 도란 치우침과 사사로움이 없는 중정의 도로서 왕도의 표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공평무사의 정치도의나 인간행위에 있어 중정의 도로서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하고 그 표준을 세우는 일을 제왕지학의 핵심으로 파악했고, <서경>의 홍법오사 가운데 사思(사유/이치)를 가장 중시하였고, 치우치거나 사사로움이 없도록 조심하는 수치修治(자신을 닦고 나라를 다스린다)의 노력을 강조하였다. 즉 퇴계는 그 당시의 정치적 집단이 모든이들에게 도덕적 각성과 결단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퇴계는 도문학이라 하더라도 나와는 교섭이 없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탐구를 말한 것은 아니다. 퇴계가 이루고자 한 자기의 도덕적인 완성이라는 성학은 지와 행, 존덕성과 도문학의 양 방면을 병진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퇴계에 의하면<대학><중용>은 진지와 실천을 위한 학문이다.

진지와 실천 혹은 치지와 역행, 능지와 능행은 모두 지와 행에 속하는 문제이다. 참으로 알고 재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지의 문제이고, 성의정심誠意正心은 행과 관련된 것이다.<대학>

명선明善이 지의 문제라고 한다면, 성신誠身은 행과 관련된 것이다.<중용>

그렇다면 퇴계에게 참으로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실제로 행한다함은 무엇인가?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一允執厥中 <서경의 16자 전결>

인심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은 오직 은미하다.
오직 정밀하게 살피고, 전일하게 지켜서, 그 중을 잡으라

이른바 퇴계사상의 중심이 되는 경敬사상에는 진지의 자세가 극명히 드러나고 있다.


"경敬으로써 주요한 방법을 삼고 모든 사물에 대하여 그 소당연과 소이연의 까닭을 궁구하지 않음이 없으며, 침잠, 반복, 완색, 체인함을 극치에 이르게 하여 세월이 오래되어 공력이 깊어짐에 이르면, 하루아침에 쇄연히 녹아 풀리고 활연히 관통함이 있음을 저절로 느끼게 되는 것이니, 이때에 비로소 체와 용이 한 근원이요, 현과 미가 틈이 없다는 말이 진실로 그러함을 알아서 위미에 미혹되지 않고 정일에 현혹되지 아니하여 중을 잡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이러 참으로 아는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천의 문제에 대해서는 성의정심 , 성신, 한가지 진실됨의 (무무실)역행이 그 실천의 근본뿌리가 되는 것이다.

" 성의는 반드시 기미에서 살펴서 터럭만큼의 부실도 없게하고, 정심은 반드시 동정에서 살펴서 한 가지 일의 부정없게 하고, 수신은 한 가지의 편벽함에도 빠지지 않게 하고 제가는 조금이라도 치우침에 버릇되지 않게 하여, 계구, 근독하고 강지, 불식하는 몇가지 역행의 절목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심과 의가 가장 관계가 큽니다. 심은 천군이요, 의는 마음이 발한 것입니다. 먼저 그 발하는 진실되게 하면, 한가지 진실됨이 만가지 거짓을 녹여 없애어 천군을 바르게 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체가 천군의 명령에 따라 행하는 바가 실이 아님이 없을 것입니다."



퇴계는 진지와 실천을 호진(상호적으로 추동하고 병행하며 나아가는 )하는 관계이며, 시종(처음이자 끝이다)이 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성학십도-제6 심통성정도 & 제7 인설도











▶ 심통성정도설

마음이 性(성)과 情(정)을 통섭하였다는 것은 사람이 오행의 빼어난 것(秀)을 받아 태어났고, 빼어난 오행에 오성(五性)이 갖추어지고, 그 오성이 동(動)하는 데서 칠정(七情)이 나옴을 말한다.

무릇 성과 정을 통회하게끔 하는 것이 마음이다. 그런 까닭에 그 마음이 고요히 움직이지 않아 "성"이 되면 "심(心)의 체(體)"이고, 마음이 느끼어 마침내 통하여 "정(情)"이 되면 "심(心)의 용(用)"이다.

장자는 말하기를 "마음은 성과 정을 통섭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적당하다. 마음이 성을 포함하는 까닭에 '인, 의, 예, 지'를 성이라 하며, 또한 "인의의 마음"이라 하는 말도 있다.

마음이 정을 포함하는 까닭에 측은, 수오, 사양, 시비를 정이라 하며, 또한 측은한 마음이니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이라 하는 말도 있다. 마음이 성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미발(未發)의 중(中)"을 이루는 일이 없어 성이 무시되기 쉽고, 마음이 정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중절(中節)의 화(和)"를 이루는 일이 없어 정이 방탕하기 쉽다. 배우는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서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그 성을 기르고 정을 제약한다면 배움의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신이 삼가 생각하여 보면, 정자의 호학론(好學論)에는 "정(情)을 제약한다"는 것이 "마음을 바로잡고, 성(性)을 기른다"는 것의 앞에 두었는데, 여기에서는 그것을 도리어 그 뒤에 두었습니다. 그 까닭은 이것으로 "마음이 성과 정을 다 포함하였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오나 그 이치를 궁구하여 말한다면, 마땅히 정자가 논한 순서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도에 온당하지 못한 곳이 있기에 조금 고쳤습니다.

이상의 삼도 중에서 위의 일도(一圖)는 임은 정씨가 그린 것인데, 그 설도 그의 것입니다. 그 가운데의 것과 아래의 도(二圖)는 신이 망령되게도 성현들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뜻의 근원을 추구하여 지은 것입니다.

가운데의 도는 기품 중에서 "본연의 성"이 "기품(氣稟)"과 혼합되지 않음을 가르켜 말한 것입니다. 자사가 말한 "천명의 성", 맹자가 말한 "성선(性善)의 성", 정자가 말한 "성이 곧 이(理)라는 성", 장자가 말한 "천지의 성"이 그것입니다. 그 성을 말함이 이와 같기 때문에, 발하여 정(發而爲情)이 되는 것도 모두 그 선한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예를 들면 자사가 말한 "중절(中節)의 정", 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의 정", 정자가 말한 "어찌 선하지 않은 것으로 이름지을 수 있겠느냐는 정", 주자가 말한 "성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본래 선하기만 한 정"이 이러한 것입니다.

아래의 도(圖)는 이(理)와 기(氣)가 합한 점으로 말한 것입니다. 공자가 말한 "서로 근사하다는 성", 정자가 말한 "성(性)이 곧 기(氣)이며 기가 곧 성이라는 성", 장자가 말한 "기질의 성", 주자가 말한 "비록 기 중에 있지만 기는 어디까지나 기이고 성은 어디까지나 성으로서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성"이 이러한 것입니다. 그 성을 말함이 이와 같기 때문에, 그 발하여 정이 되는 것 역시 이기가 서로 기다리거나, 혹은 서로 해가 되는 점으로 말한 것입나다.

예를 들면 사단과 칠정 같은 것입니다. 즉 사단은 이가 발하매 기가 따르는 것이어서 본래 순선무악하지만 반드시 이의 발함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기에 가리어지면 불선으로 됩니다.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 중절하지 못하여 그 이를 어그러뜨리면 방일하여져 악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까닭에 정자는 "성만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으면 불비(不備)하고, 기만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불명하다 . 두 가지를 따로 분리하는 것은 옮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맹자나 자사가 이만 가리켜 말한 까닭은 불비하여서가 아니라, 기를 아울러 말하면 성의 본래 선함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운데 도(圖)의 뜻입니다.

요컨데 이와 기를 겸하였으며 성과 정을 포함한 것이 마음입니다. 그리고 성이 발하여 정이 될 때가 곧 한 마음의 기미이고, 온갖 변화의 추요이며, 선악의 분기점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경의 태도를 지니는 데 오로지 하여, 천리와 인욕(人慾)의 분별을 분명히 알 뿐 아니라 더욱 이것들을 몸소 주의함으로써, 마음이 발동하지 않았을 때에는 존양의 공부(存養之功)가 깊어지고, 마음이 발동하였을 때에는 성찰의 습관이 익숙하여져서 참을 쌓고 오래 힘써 마지 않을 수 있다면, 이른바 "정일(精一)"의 방법으로 중(中)을 포착한다는 성학과, 본체를 보존함으로써 어느 경우에나 응용한다는 심법(心法)이라는 것이 모두 다른 곳에서 구하여 하기 전에 여기에서 얻어질 것입니다.











▶ 인설

인(仁)이란 만물을 낳는 천지의 마음이며, 또한 사람이 이것을 얻어 사람의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

아직 발하기 저에 마음에 "사덕(四德)"이 갖추어져 있지만, 오직 "인"만이 사덕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인은 함육하여 온전하게 하는 것이며 포괄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생(生)의 성(性)"이니 "애(愛)의 이(理)"이니 "인(仁)의 체(體)"니 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이미 발동하였을 때에는 사단(四端)이 드러나지만, 오직 "측은(惻隱)"만이 사단에 관통되고 있다. 그러므로 측은이란 두루 흐르면서 관철되는 것이고 통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성(性)의 정(情)"이니 "애(愛)의 발(發)"이니 "인(仁)의 용(用)"이니 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 즉 "미발(未發)"은 체(體)이고 , 이미 발동한 것, 즉 "이발(已發)"은 용(用)이다. 부분적으로 말한다면 "인"이 체이고, "측은"이 용이다.

"공"이라는 것이 인을 체험하도록 하는 바탕이다. 이를테면 자기를 극복하여 예로 돌아감이 인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개 공하며 인하여지고, 인하면 애하여진다. 효제(孝悌)가 그 실제상의 용이고, "서(恕)"가 그 효제를 펴나가는 것이고, "지각(知覺)"은 그것을 아는 일이다.

천지의 마음은 그 덕을 네 가지 가지고 있다. '원(元)·형(亨)·이(利),정(貞)'이 그것이다. 그런데 원은 이것들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들이 운행하면 '춘, 하, 추, 동'의 차례로 되는데, 이 중에서도 봄을 생하는 기운이 제 계절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에도 네 가지의 덕이 있다. 곧 '인, 의, 예, 지'가 그것인데, 인은 다른 덕을 모두 포함한다. 네 가지 덕이 발용하면 '애(愛), 공(恭), 의(宜), 별(別)'이라는 것으로 되는데, 측은의 마음, 즉 애의 정이 다른 정들에 관통된다.

무릇 인이란 도리로서는 천지가 사물을 낳는 마음이 사물에 즉하여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 이 인의 본체가 이미 갖추어져 있고 정이 발한 뒤에는 그 인의 용이 한정이 없다. 참으로 인을 체험하여 보존할 수만 있다면, 모든 선의 원천과 백 가지 행위의 근본이 다 여기에 있다. 이것이 바로 공문(孔門)의 가르침이 반드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인을 찾는 일"에 급급하도록 하는 까닭이다.

공자의 말씀에 "극기하여 예로 돌아가면 인을 하게 된다"고 한 것이 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면 자기의 사심을 이겨내고 천리에 돌아갈 수 있으면 이 마음의 본체가 다 있게 되며 이 마음의 작용이 다 행하여지게 됨을 이르는 것이다.

집에 있을 때에는 공의 태도를 가지고, 일을 볼 때에는 경의 태도를 가지며, 남을 대할 때에는 충의 태도를 가지는 것이 역시 이 마음을 보존하게끔 하는 근거이다.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제(悌)로 형을 섬기고, 서로 사물을 다루는 것이 역시 이 마음을 운용하게 하는 근거이다.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천지에서는 앙연(怏然)히 만물을 낳는 마음이고, 사람에게서는 온연히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니, 사덕을 포함하고 사단을 관통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대의 말과 같다면, 정자의 이른바 애는 정이고 인은 성인 만큼 애로써 인이라 이름할 수 없다는 것이 틀렸다는 것인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정자의 이른바 "애의 발로로서 인이라 이름하는 것"은 내가 논한 애의 이를 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무릇 정(情), 성(性)이라 하는 것은 비록 그 구분되는 영역은 다르지만, 그 맥락이 통하는 점에서는 각각 속하는 점이 있으니, 어찌 서로 떨어져 상관없는 것이겠는가? 나는 배우는 사람들이 정자의 말씀을 외기만 하면서 그 뜻을 구하지 않아, 마침내 판연히 애를 떼어버리고 인으로 말하는 것이 걱정이어서, 특히 이것을 논하여 그 남긴 뜻을 밝혀내는 것이다. 그대가 정자의 설과 다르다고 하니 또한 오해가 아니겠는가?

혹은 말하기를 "정자의 문도들에는 만물이 나와 하나라는 것을 '인의 체'라 하는 사람도 있고, 마음에 지각이 있는 것을 가지고 인이라는 말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모두 틀린 것인가"라고 할지도 모른다. 이 점에 대하여서는 이렇게 답하겠다.

만물과 내가 하나라고 하는 사람은 "인이 애"임을 볼 수는 있지만, 인이 "체"가 되는 참된 연유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에 지각이 있음을 말하는 사람은 "인이 지를 포함하는 것"임을 볼 수는 있지만 인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는 알찬 연유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공자가 자공의 "박시제중의 물음"에 대답한 것과 정자의 이른바 "지각으로는 인을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어찌 이것을 가지고 인을 논할 수 있겠는가?





위의 인설은 주자가 지은 것으로서, 또한 스스로 도(圖)까지 만들어, 인의 도리를 남김없이 밝힌 것입니다.

[대학]에 말하기를 "임금된 사람은 인에 머문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옛 제왕의 마음을 전하고 인을 체험한 묘리(妙理)를 구하려 한다면 어찌 여기에 뜻을 남김없이 쏟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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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계 혹은 퇴계 이황의 삶과 철학 [48]
퇴계의 시와 철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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