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희(2005-02-16 23:24:15, Hit : 2420, Vote : 395
  불교란 무엇인가? - 성철스님



성철스님

[불교의 근본사상] 불교란 무엇인가?(1)



1. 불교란 무엇인가.

쉬어가고 또 쉬어가니
절름발이 자라요 눈먼 거북이로다.
있느냐 있느냐 문수와 보현이로다
허공이 무너져 떨어지고 대지가
묻혀 버리네
높고 높은 산봉우리에 앉으니
머리엔 재 쓰고 얼굴엔 진흙발랐네.
시끄러운 거리에서 못을 끊고 쇠를 끊으니
날라리 리랄라여
들늙은이 취해 방초 속에서 춤추네
방편으로 때 묻은 옷을 걸어 놓고 부처라 하나
도리어 보배로 단장하면 누가 누구라 할꼬.
여기서 금강정안을 잃어버리면
팔만장경을 고름 닦은 휴지로다.
마명과 용수는 어는 곳을 향하여 입을 열리오
<한참 묵묵한 후>
갑, 을, 병, 정, 무로다.
억!
홀로 높고 높아 비교할 수 없는 사자왕이
스스로 쇠사슬에 묶여 깊은 함정에 들어가네.
한번 소리치니 천지가 진동하나 도리어
저 여유가 서로 침을 뱉고 웃는구나
애닯고 애닯고 애달프다
황금 궁궐과 칠보의 자리 버리고 중생을 위해
아비지옥으로 들어가네.



『나는 여기에서 본분사(本分事)로써 사람들을 대한다. 만약 나로 하여금 근기(根機) 따라 사람을 대하게 하면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있게 되느니라」고 조주스님이 말씀하셨읍니다.

근기에는 상근기도 있고 중근기도 있고 하근기도 있으니 근기를 따라서 설법한다면 자연히 삼승십이분교가 벌어지므로‘나는 본분사로써 사람들을 대할 뿐이요, 근기를 따라서 설법을 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이 조주스님의 생명선이고 선가(禪家)의 생명선입니다.
불교의 근본을 이론과 언설을 가지고 삼승십이분교 식으로 이렇게도 설명하고 저렇게도 설명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 법문이 선문의 골수가 아닌 줄 알고 들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부터 선가의 본분을 버리고 이론과 언설로써 불교의 근본 뜻을 말해 보고자 합니다.


불교란 무엇인가?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닙니다. 불교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방대한 경전이 있어서 이 경(經)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저 경을 보면 저렇게 말씀하는 등, 누가 어떤 것이 불교냐고 물으면 이것이 불교라고 한 마디로 대답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예수교나 유교나 회교같은 다른 종교들은 근본이 되는 경전이 간단하여 예수교는 성경, 유교는 사서삼경(四書三經), 회교는 코란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통칭 팔만대장경이라 하여 누가 들어도 엄두가 나지 않읍니다. 그렇게 많으니 무슨 말씀인지 알기 힘들고, 설사 좀 안다고 하여도 간단하게 어떤 것이 불교라고 말하기는 어렵읍니다. 또 전체를 하나하나 얘기하려면 끝이 없으니 간단히 무엇을 불교라 해야 하겠읍니까?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佛)란 인도말로 불다(Buddha)라고 하는데,「깨친 사람」이란 뜻입니다.

불교란 일체 만법의 본원(本源)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의 가르침으로 결국 깨달음에 그 근본 뜻이 있읍니다. 만약 불교를 논의함에 있어서 깨친다(覺)는 데에서 한발짝이라도 떠나서 불교를 말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의 근본이 깨치는데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그 깨친다는 내용은 일체 만법의 본원 그 자체를 바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일체 만법을 총괄적으로 표현하여 법성(法性)이라 하고, 각각 개별적으로 말할 때는 자성(自性)이라고 하는데, 그 근본에서는 법성이 즉 자성이고 자성이 즉 법성이니 자성이라 하든 법성이라 하든, 이것의 본원 그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을 부처라 합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법성이나 자성을 바로 깨치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 그 근본입니다.

2500여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새벽에 명성(明星)을 보시고 정각(正寬)을 이루셨으니 이것이 불교의 근본 출발점 입니다. 유교는 공자님이 옛날의 삼경이든 육경이든 이것을 읽고 외우고 하여 문자에 의지해서 거기서 얻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세웠고, 기독교는 예수가 절대신의 계시에 의해서 성경을 말씀하여 세워졌으니 곧 절대신의 계시가 기독교의 출발점이 되고 있읍니다.
반면에 불교는 문자에 의지해서 많은 지식을 얻음에 의하거나, 혹은 절대신의 계시를 받음에 의해서 부처가 된 것이 아니라, 보리수 아래에서 자기 스스로가 자기의 힘으로써 선정(禪定)을 닦아 자기의 자성을, 일체 만법의 법성을 바로 깨쳐서 부처님이 되있다는 데서 출발하고 있읍니다. 이것이 불교가 딴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절대신을 전제로 하여 존재하고 있지만, 불교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절대신을 전제로 하지 않고 오직 일체 만법의 법성인 자기의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불교 이외의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이와같은 이론은 하나도 없읍니다. 이것이 불교가 세계적으로 가장 수준 높고 가장 깊은 진리로서 천고만고에 변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입니다.
그러므로 일체 만법의 법성 즉 자기 자성을 바로 깨치는 이것이 불교의 근본 특색으로 되어 있느니 만큼 만약 이 노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된다면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들과 역대의 모든 조사(租師)스님들이 자기 자성, 자기 마음을 깨쳐서 부처를 이루었이지 절대신이나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부처를 이룬(成佛) 사람은 한사람도 없읍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생명선이며, 영원한 철칙이며 만세의 표준입니다.

불교는 성불(成佛), 즉 부처를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는 성불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큰 학자라도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서 성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읍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하려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놓았는가?

금강산이 천하에 유명하고 좋기는 하나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안내문이 필요합니다. 금강산을 잘 소개하면 「아! 이렇게 경치 좋은 금강산이 있었이구나. 우리도 한번 금강산 구경을 가야겠구나」 생각하고 드디어 금강산을 실제로 찾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내문이 없으면 금강산이 그렇게 좋은 곳인 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가 있겠읍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 언어문자로 이루어진 언설과 이론인 팔만대장경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노정기(路程記)입니다.

팔만대장경에서 불교란 이런 것이다, 부처란 무엇이다 라고 설명하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다 그것을 보고 부처님이 귀하고 높으며 불교가 좋은 줄 알아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언어문자로 된 안내문이 없있다면 부처님의 훌륭하고 좋은 법을 몇 사람이나 알고 있겠읍니까? 이러한 언어문자의 기록이 남겨져 있기 때문에 불교를 알게 되고 마침내는 부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노정기에 의지하여 실제로 길을 가서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서울을 가려고 하면서 서울 안내판이나 소개문을 아무리 들여다 보고 있어 보았자 서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걸음을 걷든지 두 걸음을 걷든지 남대문으로 쑥 들어서야지 그러기 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언어문자인 팔만대장경이 성불하는 노정기인 줄 분명히 알면 그것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언어문자를 무시하고 배격하며 교가(敎家)에서는 언어문자를 숭상한다고 흔히 생각하고 있는데, 만일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교는 꿈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교도 부처님의 가르침이지 딴 외도(外道) 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가에서도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지, 안내문만 읽으면서 평생을 지내라고는 하지 않았읍니다.

교가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제일 높은 교가 화엄종(華嚴宗) 입니다. 특히 당(唐)나라 현수(賢首)스님이 그때까지의 화엄종 교리를 집대성하여 종조(宗組)가 되있으니, 교가에 있어서 현수스님 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을 수 없을 만큼 교가의 대표적인 스님인데, 다음은 그 스님의 말씀입니다.

『이 큰 화엄연기법은 일체 만법이 구족하니 반드시 마음 가운데서 그것을 깨칠 것이요,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말로써 해석한다면 연기법을 보지 못할 것이요, 반드시 해석을 끊고 실제로 마음을 닦아야 정견(正見)에 이르는 것이다. 만약 마음으로 해석하여 얻으려고 한다면 평생을 헛일만 하는 것이다.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들어갈 것이요, 만약 입으로는 말하나 마음에 깨침이 없는 사람은 곧 미친 사람과 같은 것이다』

교가의 권위자인 현수스님이 이 화엄연기법은 언어로써는 알 수 없고 오직 마음 가운데 이것을 깨쳐야 바로 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 이유는, 불법(佛法)이란 오직 자성을 깨치는 데 있는 것이지 언어문자를 이해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엄종의 화엄연기법도 부처님 법이니 만큼 깨친다는 원칙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될 수 없읍니다. 그래서 만약 누구든지 언어문자만을 따라가고 마음 속에 깨치지 못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며 평생에 헛일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화엄경 80권 가운데서는 진정한 연기법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고, 오직 내 마음 속에서 깨쳐야만 그 화엄연기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데려다 어떤 사람과 꼭 같은 모습을 그려놓고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대답을 하겠읍니까?
천번 만번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읍니다. 아무리 잘 그려 놓아도 그림 속의 사람은 대답을 할 수 없으니 실제의 사람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읍니다.

언어문자는 노정기나 소개문은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실제 금강산이나 서울인 줄 알아서는 영원토록 금강산도 서울도 못보고, 평생 헛일한 미친 사람이 되고 맙니다.
현수스님 뿐만 아니라 교가의 모든 큰스님들도 다 그렇게 말씀합니다. 이제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반드시 현수스님 말씀 럼 마음 가운데서 깨쳐야지 여기서 한발짝이라도 벗어나면 불교가 아닙니다.

선이나 교나 자성을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라는 것이 명확하니 공연히 평생을 헛일한 미친 사람이야 될 수 없지 않습니까?
신라의 화엄종조로서 유명한 의상(義湘)스님은 남아있는 저술이 별로 없으나, 그 대표적인 저술 법성게(法性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으니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네. 이름 없고 모양 없어 일체가 끊어지니 깨친 지혜로써 알 바요, 다른 경계에서는 알 수 없네.』

불법이란 바로 깨쳐야 하는 것이니 일체 만법의 법성, 자성을 깨쳐야 하는데 그것은 언어문자의 이해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성·자성은 일체 언설과 이론을 떠나 있으므로 언어문자로써 표현할 수 없고 말로써 형용할 수 없는데 어떻게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알 수 있겠읍니까? 이 자성·법성이라는 것은 이름이 없고 모양이 없어 일체가 끊어졌기 때문에 증지(證智), 즉 깨친 지혜로써만 알 수 있고 다른 것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깨친 법성은 참으로 깊고 미묘해서(深深微妙) 일체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言語道斷) 사량분별이 멸한 것이라, 오직 깨쳐야만 알지 언어문자로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 주
1) 마명(馬鳴:Asvaghosa). 중인도 마갈타국 사람, 불멸 후 6백년 경에 출세한 대승의 논사(論師). 저서 :〈대승기신론〉 1권, 〈대장엄론경〉 15권, 〈불소행찬〉 5권 등.
2) 용수(龍樹:Nagarjuna). 불멸후 6~7백년경(B.C.2~3세기)의 남인도 혹은 서인도 사람. 인도의 대승불교톨 크게 드날린 이. 저서:<대지도론〉100권, 〈십주비바사론〉17권, 〈중론〉 4권, 〈십이문론〉 l권 등.
3) 삼승(三乘). 성품, 연각, 보살에 대한 세가지 교법.
4) 십이분교(十二分敎).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그 경문의 성격과 형식으로 구분하여 l2로 나눈 것.
5) 근기(根機). 교법을 듣고 닦아 중득하는 능력.
6) 조주(趙州:778~897). 중국스님. 임제종. 남전보원의 법제자.
7) 종조(宗祖). 한 종과(宗派)를 세운 조사(祖師)


* 편집자주 : 이번부터는 성철 큰스님의 「불교의 근본사상」을 연재합니다. 이 글은 큰스님께서 1967년 해인총림 초대방장으로 추대되어, 동안거 동안(100일간) 대중을 위해 불교의 근본교리 및 사장에 대해서 설법한 내용으로서 일명 「백일법문(百日法門)이라고도 합니다.



* 법문 출처: 해인지 <해인법문>

[불교의 근본사상] 불교란 무엇인가?(2)




2.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다.

이제까지 계속적으로 우리가 하루 빨리 깨쳐야 된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우리의 인간에게 어떤 능력이 잠재되어 있기에 자성(自性)을 깨치라 하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 아닐 수 없읍니다.
우리에게 일체 만법의 근본을 깨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읍니다.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처음 정각(正寬)을 이루시고 일체 만유를 다 둘러보시고 감탄하시며 이르시기를 「기이하고 기이하구나!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와 같은 지혜덕상이 있건마는 분별 망상으로 깨닫지 못하는구나」라고 하셨읍니다.

菩提樹 下에 初成正寬하시고 歎曰 奇哉奇哉라 一切衆生이 皆有如來智慧德相이언마는 以分別妄想而 不能證得이로다.
부처님의 이 말씀이 우리 불교의 근본 시작이면서 끝인데 부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이 한 말씀은 인류사상 최대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부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는 사람이 꼭 절대자가 될 수 있나 없나 하는데 대해서 많이들 논의해 왔지만 부처님 같이 명백하게 인간이면 누구든지 절대적인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공공연히 선포한 사람은 별로 없었읍니다. 인도에서 범아일여(凡我→如) 같은 사상이 있기는 하지만 불교와는 틀립니다.
이 말씀을 정리해 보면 부처님이 스스로 바로 깨쳐서 우주 만법의 근본을 바로 알고 보니 모든 중생이 모두 부처님과 똑같은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능력만 발휘하면 스스로가 절대자이고 부처이지 절대자가 따로 있고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인간 속에 무한한 근본 능력이 있음을 부처님이 처음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중생들이 무한하고 절대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늘 중생 노릇만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읍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별 망상에 가려서 깨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로소 우리가 성불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깨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땅밑에 금이 많이 있는 줄 알고 땅을 파면 금이 나오지만 금이 없다면 아무리 땅 밑을 파도 금이 나오지 않는 것이니 금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서 어느 누가 금을 찾겠다고 땅을 파는 헛일을 하겠읍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에게 부처님과 똑같은 그런 능력이 없다면 아무리 깨치는 공부를 해보아도 헛일입니다. 광맥이 없는 곳을 파는 헛일을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에는 우리 중생에게는 무진장의 대광맥이 사람 사람 가슴속에 다 있다 했으니 이것을 개발하고 이것을 소개한 것이 불교의 생명선인 것입니다. 세계의 학자들도 부처님이 인간성에 대한 절대적인 능력을 인정한 것은 인류 역사상 대발견이라고 인정하고 칭송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나도 내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할까 합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좀 엉뚱한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너무 이상주의자였다고나 할까요 사람이 걸어 다니지 말고 하늘로 훨훨 날아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거나, 사람이 죽는데 죽지않고 영원토록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들이 조그마할 때부터 머릿속을 왔다갔다 했읍니다. 이런 생각들만하고 사니 남이 볼 때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우습게 보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이런 책 저런 책 여러가지 철학책 등을 꽤나 광범위하게 보았지만 내가 볼 때는 영원하고 자유한 길을 제시한 책은 하나도 없었읍니다.

그런데 어느 날 「채근담강의」라는 책이 있어 그것을 펼쳐 보다가 한 군데 눈이 딱 멈추었읍니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펼쳐 여니 한자 글자는 없으나 항상 큰 광명을 비친다」
我有一卷經하니 不因紙墨成이라
展開無一字호대 常放大光明이니라


이 글귀를 읽으니 참 호기심이 많이 났읍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종이에다 먹으로 언어 문자로 설명해 놓은 것 가지고 안될 것이다. 종이와 먹을 떠난 참 내 마음 가운데 항상 큰 광명을 비치는 경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글자 한 자도 없는 이 경을 읽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그 후 이런 길을 많이 모색해 보았지만 다른 방법은 없고 참선을 좀 익혀 보았읍니다. 그뒤로 대광명을 비치는 문자 없는 경이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을 좀 찾아본다고 중이 된지 벌써 삼십 년이 지녔읍니다만 그래 세월만 허송하고 말았읍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덕상을 가졌다」는 이 글자 없는 경(經), 말하자면 자아경(自我經),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경을 분명히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언어문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할까 합니다.

장자(莊子)에 있는 얘기를 들어 보겠읍니다.
어떤 사람이 왕궁에 가서 일을 하는데 임금이 늘 책을 보고 있어서 그 사람이 임금에게 물었읍니다.

「임금이시여, 무슨 책을 보십니까?」
「옛날 현인들이 말씀한 좋은 책이니라」
「그럼 지금 현인과 철인들이 살아 있읍니까?」
「아니 죽고 없느니라」
「죽고 없으면 그 책은 무엇하는 것입니까?」
「그 현인들이 말해놓은 것을 기록한 것이니라」
「그럼 그 책이 말 그대로는 아니겠지요?」
「그야 기록만 한 것이지」
「임금이시여, 사람이 술을 마시려면 술을 먹어야지 술찌꺼기는 소용없읍니다. 현인은 죽고 없는데 기록해 둔 말은 술찌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임금이 그 말을 듣고 문득 깨달은 바 있어 마음을 돌려 문자라는 것이 옛 사람의 찌꺼기이지 진리의 묘를 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우화입니다.
보통 기술도 그렇습니다. 장자에 많이 나오는 얘기지만 아무리 재주가 좋고 글이 좋다고 하여도 목수의 기술, 용접의 기술, 수레바퀴 만드는 기술 등 그 모든 기술의 묘리(妙理)는 절대로 말이나 글로써 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오래오래 하여 마음으로 터득해야지 말로서나 문자로서는 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만 문자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깊이 생각해 보는 사람은 다 언어 문자의 피해를 생각해서 경책하는 것입니다.


「널리 배우고 지혜가 많으면 자성이 도리어 어두어지느니라」
廣字多智하면 神識이 轉暗이니라 .
달마스님의 말씀입니다.

「도를 위해서는 날마다 덜고, 배음을 위해서는 날마다 더하느니라. 덜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르니 무위로써 못 할 것이 없느니라 」
爲道日損이요 爲學日益이라 損之又損하야 以至於無爲니 無爲而無不爲니라.

이것은 노자(老子)의 말씀인데 실지로 도에 깊이 들어온 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속의 번뇌망상을 쉬는 것이 더는 것이니 도를 이룰려면 분별망상을 쉬어 버려야 하고 학문을 배우려면 문자를 하나라도 기억하여 더 보태야 하는 것입니다.


3. 불교의 바른 믿음과 삿된 믿음

불교에는 바른 믿음(正信)과 잣된 믿음(邪信)이 있읍니다. 팔만대장경이 부처님 설법인데 다 바른 믿음이지 삿된 믿음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방편가설(方便假說)과 실담(實談)이 있는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옛 조사스님들도 마음이 즉 부처(卽心卽佛)라는 말 이외에는 모두 바른 믿음이 아니고 삿된 믿음이라고 했읍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즉 부처라고 아는 이것이 바른 믿음이며 부처님의 바른 법(正法)인줄 바로 알아서 자기 마음을 깨쳐서 부처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도를 깨쳐서 부처를 이루었지 깨치지 않고 부처를 이룬 사람이 없고 조사된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우리 불교의 철칙(鐵則) 입니다.

유교에 양명학파가 있는데 불교와 관련이 많습니다. 그 왕양명의 말을 인용해 보겠읍니다.
「사람 사람마다 지남(指南)이 있어 만가지 변화의 근원이 본래 마음에 있구나, 앞서의 잘못된 소견을 웃노니 가지마다 잎마다 밖으로 찾았네.
……………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것을 홀로 알 때 이것이 하늘과 땅 만유의 근본 기틀이로다. 자기집의 무진장의 보화를 버리고 집집마다 밥그릇 들고 거지노릇 하는구나」.

人人이 有箇定盤針하야 萬化根源이 本在心이라 却笑從前顧倒見하노니 技技葉葉外頭尋이로다…
無聲無昊를 ?知時에 此是乾坤萬有基라 ?却自家無盡藏하고 沿門持針效負兒로다.


여기서도 공연히 언어문자에 끄달려 딴 곳을 더듬고 있었음을 경책하니 가지마다 일마다 밖을 찾았다고 반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루 바삐 마음을 돌이켜서 방편가설과 삿된 믿음에 얽매이지 말고 내 마음이 오직 부처인줄 알아서 내 마음속의 무진장의 보물 창고의 문을 열자는 것입니다. 왜 남의 집에 밥 벌어 먹으러 다니며 거지 노릇을 합니까?

[불교의 근본사상] 불교란 무엇인가?(3)




4. 불교의 근본과 특징

이제까지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계속해서 이야기 해왔읍니다. 이야기가 조금 벗어나지만 종교란 궁극적으로 무엇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불교란 어떤 종교상의 특징과 무엇을 근본으로 삼느냐 하는 문제를 잠깐 살펴봅시다.

물론 불교나 예수교나 회교나 이미 다 알다시피 세계적인 종교임에는 틀림없으나 각기 그 교조의 입장이 다르고 그 내용이 상이(相異)하므로 같은 종교라고 하더라도 사뭇 다를 수 밖에는 없겠읍니다.
그러나 각 종교의 입장과 내용은 다르다 할지라도 구경목표(究竟目標)는 다 같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자면 서울로 갈 때 북쪽에서 가든지 남쪽에서 가든지 서쪽에서 가든지 동쪽에서 가든지 어디서 가든지 간에 서울이 목표인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목표는 공통적 입니다. 그러면 그 공통적인 종교의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유한의 세계는 생멸(生滅)의 세계이며 절대·무한의 세계는 해탈(解脫)의 세계이나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종교의 근본목표인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이란 것은 상대·유한의 세계에서는 실현되지 않읍니다. 인간의 근본 욕구는 영원한 행복에 있는데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영원한 행복을 얻지 못하니 우리가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갈 것을 목표로 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읍니다. 이것이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 종교의 근본 목표입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는 그만두고 불교의 구경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부처님이 다른 경에서도 많이 말씀하셨지만 기신론(起信論)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읍니다.

「일체고(一切苦)를 버리고 구경의 낙을 얻는다」(離一切苦하고 得究竟樂이니라)

모든 고(苦)를 다 버려버리고 종국적인 최후의 낙,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樂)을 얻는다는 것이 우리 불교의 목표이니 그것은 곧 상대·유한의 세계를 떠나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는 것과 그 내용이 꼭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대·유한의 세계를 버리고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울로 갈려면 서울 가는 이유를 알아야지 무조건하고 서울만 간다고 하면 미친 사람이니 그 이유를 좀 설명하겠읍니다.

천지만물이 많아서 동물도 있고 식물도 있고 무생물도 있읍니다. 동물 가운데 사람이 딴 동물과는 모든 면에서 수승(殊勝)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읍니다. 사람이란 살아 있는 물건인데 살아 있는 동안에 무엇을 목표로 하고 활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철학자나 과학자나 종교가나 어느 학자 어느 사람이든지 간에 사람이란 살아 있는 동시에 분명한 살아가는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행복에 있다고 말하고 있읍니다.
사람이란 살아있는 동안에 그 산다는데 있어서 고생되는 조건이 많이 따라 있읍니다. 여러 학자들이 사람의 고생의 내용을 각 방면에서 연구하고 분석해 보면 사람이란 실제로 고(苦)의 존재이지 낙(樂)이란 극히 일부분 뿐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읍니다.

「삼계가 불타는 집이요, 사생이 고해로다」(三界가 火宅이요 四生이 苦海로다)

삼계, 좁생이 사는 이 우주 전체가 불타는 집과 같다는 것이니, 그렇게 고생이 많다는 말이며, 사생(四生), 생명으로 태어나는 모든 것이 고(苦)의 바다라는 것이니 불타는 집에서 고생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나서 살아있는 동안에 고생만, 고생만 하다가 결국은 죽고 마는 것이니 그 동안 살다가 혹 좋은 일도 더러 있기는 있지만 그것은 순간적이어서 인생 전체로 볼 때는 고(苦)는 많고 낙(樂)은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는 데 자살(自殺)할 수도 없고 그냥 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살지 않을 수도 없는데 어떻게 좀 고생을 덜 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느냐 하는 생각은 고생하는 사람이 생각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역사적으로 수 천 년 동안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야만 이 고생하는 중생 가운데서 좀더 행복하게 살 수가 있겠느냐 하여 그 방법을 모색해 왔읍니다. 행복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일시적인 행복과 영원한 행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이것을 보면 모든 것이 다 상대·유한으로 되어 있어서 모순에 모순으로서 투쟁의 세계입니다. 투쟁의 세계에서 일시적으로 행복을 얻었다 해도 종말이, 끝이 있고 맙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이상 일시적인 행복에만 만족할 수는 없으니 당장 한 시간 후에 죽더라도 지금은 어떻게 하면 좀 오래 살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느냐는 것을 공상(空想)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니 이것이 영원한 행복의 추구라고 볼 수 있읍니다. 그래서 영원한 행복을 상대·유한의 세계에서는 이룰 수가 없으니 절대·무한의 세계를 구상하고 따라서 거기 가서 영원한 행복을 받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종교의 근본 뜻이라고 말해 왔읍니다.
이 현실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을 성취할 가능성이 없으니 그것이 실현될 현실을 떠난 다른 세계를 모색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예수교의 천당설(天堂說)입니다.

이 현실 세계란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 내에 있어서 영원하고 무한하지 못합니다. 이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리 뛰고 굴리고 재주를 넘어 보았자 중생이 참으로 본능적으로 욕망하는 영원한 행복이라는 것은 절대로 성취할 수 없읍니다. 그러니만치 이 현실 세계에서는 영원한 행복의 추구를 완전히 포기하고 다른 세계를 찾아 그 곳만이 절대·무한하며 영원한 행복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 예수교의 천당설입니다.
저 하늘을 자꾸자꾸 올라가면 천당이 있으니 그곳에는 모든 것을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을 못할 것이 하나도 없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일체를 초월한 절대자 하나님이 계시니, 그 하늘 나라 천당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거기 한번 들어가면 영원토록 생명을 누리고 영생하여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여 왔읍니다.

사람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리는 곳이 있다면 현실 이것을 다 버리고 그 곳으로 가자고 누구든지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니겠읍니까? 아방궁이다 뭐다 해봐야 다 헛 것이니 다 버리고 그곳으로 가자 이것이 각 종교의 시발점(始發點) 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종교가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이후부터 인류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지배하였는데 불교는 삼천년, 예수교는 이천년, 바라문교는 사천여년의 세월이 흘러왔읍니다.
사람의 지혜가 발달되기 전에는 천당설을 아무 주저 없이 믿고 따랐는데 차차로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그런 가르침이 거짓말 같은 생각이 들어 방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큰 신학자들이 나서서 “합리(合理)·불합리(不合理)를 논하지 말고 예수의 말씀을 무조건 믿으라”고 했읍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저 유명한 신학자 성 어거스틴은 “불합리(不合理)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고 했읍니다. 그러므로 예수교에 대한 근본이 어디 서있느냐 하면 절대적인 믿음,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 절대적인 신에 기반을 두었습니다. 요즈음에 와서는 우주 과학시대가 되어서 하늘 나라를 맹목적으로 그대로 믿으라 하는 것은 통하지 않게 되었고 여러 신학사상들이 주장되어 예수교 사상 자체도 전환하고 있지만 근본 교리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읍니다. 그러므로 천당에 계시는 절대 신인 하나님을 내놓고는 예수교를 찾아볼 수 없고 하나님을 의지해서만 그 하나님의 힘, 타력(他力)으로써 절대·무한의 세계인 하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니 다른 여타의 종교들도 대개 그런 경향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는 그와는 다릅니다. 상대·유한의 세계를 벗어난 절대·무한의 세계를 어느 곳에서 찾느냐 하면 자기의 마음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절대·무한의 세계가 다 갖추어 있는 것이지 내 마음 밖에, 이 현실밖에 따로 있지 아니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딴 종교하고 틀리는 불교의 독특한 입장입니다. 혹 어떤 때는 타력적인 방편을 쓰는 것도 결국은 자력으로 자기 마음을 밝히려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불교를 믿으려면 자기에게 그러한 절대·무한의 세계가 갖추어 있다는 것,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이 근본 조건입니다.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여 사용하기 전까지는 그것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부처님이나 옛 조사 스님들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날 심리학이나 정신 의학의 발달로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이 있음이 차츰차츰 실증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불교는 처음과 끝이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인간을 완성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는데 그 인간이 상대적 존재냐 절대적 존재냐 하면 절대적 존재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절대적 존재이며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개발해서 참으로 완전한 인격을 완성하자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어서 앞으로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많은 기여를 할 날이 있을 줄 나는 믿습니다.
이 소식을 게송(偈頌)으로 한번 읊으면 이러합니다.



기이하다 내 집의 큰 보배창고여
무한한 신기로운 공이 측량키 어렵네
의지(意地)를 몰록 벗어나
마음 근원을 사무치면
신령한 빛이 영원토록
무너지지 않는 몸을 비추도다.

奇哉自家大寶藏이여
無限神功妙難測이로다
頓超意地徹心源하면
靈光이 長照不壞身이로다.


이렇게 내 마음 속의 보배 창고를 확실히 믿고 개발하면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되는 것 입니다.



※ 주
사생(四生) : 1은 태생(胎生)으로서 사람과 같이 모태(母胎)에서 신체를 형성한 후에 출생함을 말하며 2는 난생(卵生)으로서 새와 같이 알의 껍질 속에서 신체를 형성한 후에 출생함을 말하며 3은 습생(濕生)으로서 벌레와 같이 습함에 의해서 신체를 받는 것을 말하며 4는 화생(化生)으로서 의탁하는 곳 없이 오직 업력에 의해서 홀연히 일어나는 것을 말함이니 하늘과 지옥 및 태초의 중생들이 모두 이것이다.



* 법문 출처: 해인지 <해인법문>



[불교의 근본사상] 불교란 무엇인가?(4)




5. 참선은 성불의 지름길

이제까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계속 강조해 왔읍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마음을 깨치려고 하면 여러 방법이 있는데 교(敎)에 있어서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삼승십이분교〉가 벌어지고 또 선(禪)에 있어서는 언어 문자를 버리고 바로 깨쳐야 한다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선의 근본 입장에서 볼 때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기 전에 이미 알아 마쳤다 해도 까닭없이 땅에서 넘어져 뼈를 뿌러트리는 사람입니다.

하물며 덕산스님이 비오듯이 몽등이로 때리고 임제스님이 우뢰같은 할(喝)을 한다 하여도 곽 속에서 눈을 부릅뜨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읍니다. 송장이 곽 속에서 아무리 눈을 떠 봐도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그런데 내가 법상에 앉아서 쓸데없이 부처가 어떻고 선이 어떻고 교리가 어떻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이 법문은 중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생들에게 독약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이 법문이 사람 죽이는 독약인 비상인줄 바로 알 것 같으면 그런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불법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읍니다.

부처 되려는 병, 조사(祖師) 되려는 병, 이 모든 병을 고치는데는 우리의 자성을 깨치면 이런 모든 집착을 벗어나서 참으로 자유자재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자기자성을 깨치지 못하고서는 집착을 버릴래야 버릴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이 바른 사람이라면 부처님이나 달마조사가 와서 설법을 한다 하여도 귀를 막고 달아나 버려야 합니다.

예전에 무착(無着)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그 절 공양주를 하고 있었읍니다. 그런데 하루는 큰 가마솥에 팥죽을 끓이고 있는데 그 팥죽 끓는 솥 위에 문수보살이 현신(現身) 하였읍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큰 종을 치고 향을 피우고 대중을 운집(雲集) 시키려고 야단했을 터인데 무착스님은 팥죽을 졌던 주걱으로 문수보살의 뺨을 이리치고 저리치면서 말했읍니다.
「문수보살은 너 문수보살이며 무착은 내 무착이로다」
그러자 문수보살이 게송을 읊고 사라졌읍니다.

그와 같이 이 대중 가운데서 「성철은 저 성철이고 나는 나다 그런데 긴 소리 짧은 소리 무슨 잠꼬대가 그리 많으냐」 하고 달려드는 진정한 공부인이 있다면 내가 참으로 그 사람을 법상 위에 모서 놓고 한없이 절을 하겠읍니다. 그런 무착스님의 기재가 참으로 출격장부(出格文夫)이며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내 밥 내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어깨서 남의 집 밥을 구걸하느냐 말입니다. 부디 내 밥 내 먹고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언어문자를 익히는 것 뿐만 아니라 육도만행(六途萬行)을 닦아서 정각(正覺)을 성취하는 것이 어떠냐고 흔히 나에게 수화들이 묻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예전 조사스님들이 많이 말씀하셨읍니다.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하려고 하는 것은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과 같다」고 그런데 어떤 바보같은 사람이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 갈 것입니까. 육도만행이 보살행으로서 아무리 좋다고 하지만은 바로 자기 자성을 깨치는 것만은 못한 것입니다.

이조 오백년 동안 불교계를 볼 때 서산(西山)스님을 대표라고 대개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은 좀 틀립니다. 진묵스님이 말씀하셨듯이 명리승(名利僧)이지 참다운 도인(道人)이 아니더라 그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조 오백년 동안의 불교 대표자라고 학인들은 봅니다. 다음의 말씀은 서산스님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일생동안 어리석은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승이 되길 바라지 않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산스님의 문집(文集)이 여러 권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이런 결심이 있었기 때문에 서산스님의 문집이 후세에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만 만일 그러한 투철한 각오가 없었다면 일종의 문자승이나 되고 말았지 어찌 이조오백년을 대표하는 스님이 되었겠읍니까.

우리가 앞으로 공부를 함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경전을 배우면서 참선을 하고, 참선을 하면서 경전을 배우고 조사어록을 얽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언어문자는 산 사람이 아닌 종이 위에 그린 사람인줄 분명히 알아서 마음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기 대중 가운데서도 여러가지로 공부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염불하여 삼매를 성취하여 성불한다.
주력으로 삼매를 성취하여 성불한다.
경을 보아 삼매를 성취하여 성불한다는 등등.
그러나 그 무엇보다는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것이 성불하는 지름길이라고 조사스님들은 다 말씀합니다. 그러니 이 법회(法會) 동안에는 누구든지 의무적으로 화두를 해야겠읍니다. 이제 내가 화두를 일러줄 터이니 잘 들어십시요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不是心不是物不是佛이니 是什?오)
내가 일러준 이 화두의 뜻을 바로 알면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고 자성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흔히 이 화두의 뜻을 잘못 알고 마음이라 하면 어떻고 물건이라 하면 어떻고 부처라 하면 어떠냐고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늘 마음 속에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의심을 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자기가 참구하는 화두가 있는 사람은 그 화두를 놓치지 말고 더욱 간절히 의심을 지어가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읍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잠깐 동안이 나마 조용히 앉아 있으면 항하사 모래알 같이 많은 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나으니라. 칠보탑은 필경 부서져 티끌이 되거니와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바른 깨달음을 이루느니라」
부처님 당시에도 마음을 깨치는 방법으로 경행(輕行)과 화선(座禪)을 가르치셨읍니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선정(禪定)을 익혀라〉고 간절하게 말씀하셨읍니다.

선정(禪定)은 앉아 있든지 서 있든지, 말할 때나 말하지 않을 때나 마음이 망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곳으로 모이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오로지 경행과 화선만을 가르치시고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 우리들은 오직 참선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가서 앞에 나온 임제스님과 덕산스님에 대해서 앞으로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잠시 언급할까 합니다.
두 분 스님은 예로부터 조사스님들 가운데서도 영웅이라고 칭송을 받는 분들 입니다.
임제스님은 처음 황벽스님에게 와있으면서 수행의 태도가 순수하고 열심이었읍니다. 그때 수좌(首座)로 있던 목주스님이 계셨는데 감탄하여 “비록 후배이기는 하나 대중과는 다른 바가 있구나”고 말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임제스님에게 물었읍니다.
「상좌(上座)는 여기 온 지가 몇년이나 되었는가」
「삼년입니다」「그러면 황벽스님께 가서 법을 물어본 적이 있는가」
「없읍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를 모르겠읍니다」
「너는 어찌하여 황벽스님에게 가서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긴요한 뜻입니까〉 하고 물어보지 아니 하느냐」그 말을 듣고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가서 그렇게 불었는데, 묻는 소리가 아직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황벽스님이 갑자기 몽등이로 스무대나 때렸읍니다. 임제스님이 몽등이만 맞고 내려오니 목주스님이 물었읍니다.
「여쭈러 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제가 여쭙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실스님이 갑자기 때리시니 그 뜻을 제가 알 수가 없읍니다」
「그러면 다시 가서 여쭈어라」
그 말을 듣고 임제스님이 다시 가서 여쭈니 황벽스님은 또 몽등이로 때렸읍니다. 이와같이 세번가서 여쭙고 세번 다 몽등이만 맞고 말았읍니다. 임제스님이 동아와서 목주스님께 말했읍니다.
「다행히 자비를 입어서 저로 하여금 황벽스님께 가서 문답케 하셨으나 세번 여쭈어서 세번 다 몽등이만 실컷 맞았읍니다. 인연이 닿지 않아 깊은 뜻을 깨칠 수 없음을 스스로 한탄하고 지금 떠날까 합니다.」
「네가 만약 갈 때는 황벽스님께 인사를 꼭 드리고 떠나라」
임제스님이 절하고 물러가자 목주스님은 황벽스님을 찾아가서 여쭈었읍니다.
「스님께 법을 물으러 왔던 저 후배는 매우 법답게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하직 인사를 드린다고 오면 방편으로 그를 제접하여 이후로 열심히 공부케 하면 한 그루 큰 나무가 되어 천하 사람들을 위해 시원한 그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임제스님이 와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황벽스님이 말씀하셨읍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너는 고안(高安) 개울가의 대우(大愚) 스님에게 가거라. 반드시 너를 위해 말씀해 주실 것이니라」
임제스님이 대우스님을 찾아 뵈오니 대우스님이 물었읍니다.
「어디서 오는고」
「황벽스님께 있다가 옵니다」
「황벽이 어떤 말을 가르치든가」
「제가 세번이나 〈불법의 긴요한 뜻을 여쭈었는데 세번 다 몽등이만 맞고 말았읍니다. 저에게 무슨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겠읍니다」
「황벽이 이렇게 노파심철(老婆心切)로 너를 위해 철저하게 가르쳤는데 여기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이냐」
임제스님이 그 말 끝에 크게 깨치고 말했읍니다.
「원래 황벽의 불법(佛法)이 별것 아니구나」
대우스님이 임제의 멱살을 잡고 말했읍니다.
「이 오줌싸개 놈아 ! 아까는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더니 지금은 또 황벽의 불법이 별 것 아니라고 하니 너는 어떤 도리를 알았느냐, 빨리 말해보라! 빨리 말해보라」
임제스님은 대우스님의 옆구리를 세번 쥐어 박았읍니다. 그러자 대우스님이 멱살 잡은 것을 놓으면서 말했읍니다.
「너의 스승은 황벽이지 내가 간여할 일이 아니니라」
임제스님이 대우스님께 하직하고 황벽스님에게 돌아오니, 황벽스님은 임제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물었읍니다.
「이놈이 왔다 갔다만 하는구나. 어떤 수행의 성취가 있었느냐」
「다만 스님의 노파심절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서 오느냐」
「먼저번에 일러 주신대로 대우스님께 갔다 읍니다」
「대우가 어떤 말을 하던가」임제스님이 그간의 일을 말씀드리자 황벽스님이 말씀했읍니다.
「뭣이라고 ! 이 놈이 오면 기다렸다가 몽등이로 스무찰이나 때려주리라」
그러자 임제스님이 말했읍니다.
「기다릴 것 무엇 있읍니까. 지금 곧 맞아 보십시오」
하면서 황벽스님의 뺨을 후려쳤읍니다. 황벽스님이 말했읍니다.「이 미친 놈이 여기 와서 호랑이 수염을 만지는구나!」
그러자 임제스님이 갑자기 고함을 치니 황벽스님이 말했읍니다.
「시자야 이 미친 놈을 끌어내라」
그 후 임제스님이 화북(華北) 지방으로 가서 후배들을 제법하면서 사람만 앞에 어른거리면 고함을 쳤읍니다. 그래서 임제스님이 법 쓰는 것을 비유하여 우뢰같이 고함친다(喝)고 평하였읍니다.

덕산스님은 처음 서촉(西蜀)에 있으면서 교리연구가 깊었으며 특히 금강경에 능통하여 세상에서 주금강(周金剛)이라고 칭송을 받았읍니다. 스님의 속성(俗姓)이 주(周)씨 였읍니다. 당시 남방에서 교학을 무시하고 오직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하는 선종의 무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여 평생에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금강경소초(金剛經疏?)를 젊어지고 떠났읍니다. 가다가 점심(點心) 때가 되어서 배가 고픈데 마침 길가에 한 노파가 떡을 팔고 있었읍니다. 덕산스님이 그 노파에게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그 떡을 좀 주시오」 하니, 그 노파가 「내 묻는 말에 대답하시면 떡을 드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먹을 드리지 않겠다」고 하니 덕산스님이 「그러자」고 하였읍니다. 노파가 물었읍니다.
「지금 스님의 걸망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읍니까?」
「금강경소초가 들어 있소」
「그러면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미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 스님은 지금 어느 마음에 점심을 하시려고 하십니까」
「점심(點心) 먹겠다」고 하는 말을 빌어 이렇게 교묘하게 질문했읍니다. 그러자 이 돌연한 질문에 덕산스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읍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그렇게도 금강경을 거꾸로 외우고 모로 외우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떡장수 노파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다 달아나 버렸읍니다. 그래서 노파에게 물었읍니다.
「이 근방에 큰 스님이 어디 계십니까」
「이리로 가면 용담원(龍潭院)에 숭신(崇信) 선사가 계십니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곧 용담으로 숭신선사를 찾아 갔읍니다.
「오래 전부터 용담(龍潭)이라고 말을 들었더니 지금 와서 보니 용(龍)도 없고 못(潭)도 없구만요」
하고 용담 숭신선사에게 말하니 숭신스님이 말했읍니다.
「참으로 자네가 용담에 왔구만」
그러자 또 주금강은 할 말을 잃어버렸읍니다. 그 때부터 숭신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하루는 밤이 깊도록 숭신스님 방에서 공부하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오려고 방문을 나서다가 밖이 너무 어두워 방안으로 다시 들어 갔읍니다. 그러니 숭신스님이 초에 불을 켜서주니 덕산스님이 받으려고 하자 곧 숭신스님이 촛불을 혹 불어 꺼 버렸읍니다. 이 때 덕산스님은 활연히 깨쳤읍니다. 그리고는 숭신스님께 절을 올리니 용담스님이 물었읍니다.
「너는 어깨서 나에게 절을 하느냐」
「이제부터는 다시 천하 노화상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겠읍니다」
고 덕산이 말했읍니다. 그 다음날 덕산스님이 〈금강경소초〉를 법당 앞에서 불살라 버리며, 「모든 현변(玄辯)을 다하여도 마치 터럭 하나를 허공에 둔 것 같고, 세상의 추기(樞機)를 다한다 하여도 한 방울 물을 큰 바다에 던진 것 같다」고 하였읍니다.

그 후 후배들을 제접 할 때는 누구든지 보이기만 하면 가서 몽등이로 때려 주었읍니다. 그래서 덕산스님이 법 쓰는 것을 비유하여〈비오듯이 몽둥이로 때린다〉고 평하였읍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씩 대중방을 뒤져 책이란 책은 모조리 찾아내어 불살라 버리곤 하였읍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참선에 신심을 내어 자성을 바로 깨치도록 노력합시다.


* 법문 출처: 해인지 <해인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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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란 무엇인가? - 성철스님  율희  2005/02/16 2420 395
      불교란 무엇인가? - 성철스님 [10]  율희  2005/02/16 2110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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