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건강하시지요?
이곳 케임브릿지에서는 지난주 메이윅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보통 이쪽 날씨가 그렇듯 전반 3일은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후반 3일은 그나마 햇살을 볼 수 있었지요. 이번에 다룬 텍스트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 책 9장이었는데, 몇가지 관련 소식을 보고드립니다.
1. 파리의 티치아노 도란디 교수가 디오게네스의 새 텍스트를 준비 중이며, 2008-10년에 걸쳐 세권 (1-4장, 5-7장, 8-9장)으로 케임브릿지대학출판사에서 출판될 계획입니다. 로엡 텍스트와 말코비치 텍스트가 있기는 하나, 도란디 교수의 이번 작업은 문제시되는 텍스트 각각에 대해 3개의 아파라투스를 포함한, 상당히 업그레이드된 정교한 작업이라는 평때문에, 영미유럽 고전학회의 기대를 크게 받고 있습니다. 그와의 저녁 식사에서, 현재 6권까지 마무리되었고 7권을 진행중이라 들었습니다. 텍스트 비평가답게 '디오게네스 텍스트에 문법상 오류가 너무 많아, 매번 상당한 수정의 유혹을 느끼지만, 텍스트 자체가 교정을 거치지 않은 일차 초안인 만큼, 텍스트 수정보다는 아파라투스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하더군요.
2. 이번 메이윅 세미나 마지막 '회고' 세션에서는, 로버트 와디의 주도 하에 특히 디오게네스 저서 전반의 의미와 지위, 방법론에 대해 심도있고 활발한 논의가 오고갔습니다.
1) 가령 이번에 집중적으로 다룬 9장은 고대희랍 회의주의의 계보사 (succession story) 를 담고 있는데, 고대 퓌론과 퓌론주의 사상을 레우키포스 및 데모크리토스와 연결시키는 계보사는 다른 주석서들에서도 발견되지만, 디오게네스 9장의 계보사가 이례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를 17개의 긴 세션으로 소개할 뿐더러, 간단하긴 하지만 파르메니데스, 제논, 멜리소스 등 엘레아 학파까지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는 그 특징 때문에, 이 계보사의 타당성과 일관성, 또 디오게네스 보고의 신빙성 등이 저서 전반의 특징과 아울러 논의되었습니다. 논의는 디오게네스가 보고한 이 '석셰션 스토리'에 지금까지보다 더 큰 철학적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쪽으로 모아졌습니다.
2) 디오게네스 저서가 지닌 주석서로서의 지위에 대해서는 두 견해가 제출되었습니다. (1) 말콤 스코필드 교수는, 저서가 당대까지 제철학학파의 경쟁 분위기를 반영하며 디오게네스가 각학파의 권위있는 소스를 근거로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이를 소개하고 있다는, 디오게네스 저서의 신빙성론을 펼쳤습니다. (인용하면, '젊은이들이 각 학파들의 견해를 접하고서 말야, 어떻게든 싸인업 (sign up) 해야 했다 이 말이지!') (2) 제프리 로이드 경도 이를 강하게 부인하진 않았지만, 말콤보다는 신중론을 펼쳤습니다. 저서가 로마시대의 더 넓은 문화적 맥락을 반영하며, 제학파 철학의 대중적 소개와 교육을 반영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영국 BBC방송의 고대철학교육프로그램들처럼 말이죠. 로이드 경의 견해는 왜 디오게네스가 당대까지 중심철학자들의 삶을 숱한 코믹 일화와 함께 그리도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소개했는가라는 의문에 답을 줄뿐더러, 오늘날 철학대중교육의 커리큘럼과 소개의 중요성이라는 시사성과 맞물려 적지 않은 지지를 얻었습니다. (저도 세미나에서는, 가령 7장 48을 보면 스토아학파가 학파 사상에 대한 대중용 소개서를 만들었고 디오게네스가 이를 직접 인용하겠다고 말하는 구절이 있는데, 이를 예로 들어 제프리의 견해를 지지했습니다만, 말콤의 강한 견해가 적잖이 매력적이었습니다.)
3. 마지막으로, 업그레이드된 텍스트를 참조하여 새 번역서의 필요성이 사석에서 논의되었고 그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기실 로엡번역 등 기존 번역서가 없지는 않으나, 텍스트 크리틱과 아파라투스를 반영하지 않아 번역상의 많은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이에 (1) 텍사스주립대 고전학과 스티브 화이트 교수가 새 영어번역을 준비 중인데, 2009-10년에 두권의 번역서로 출판할 계획이라 합니다. 이번 메이윅 세미나에 그가 제출한 9장을 아래 첨부파일로 실었습니다 (잘 업로드되어야 할텐데---). (2) 티치아노의 새 텍스트 출간과 괘를 맞추어 좌바토 박사 등 몇몇 이태리 학자들도 아직 시작하진 않았지만 새 이태리어 번역출간 계획을 갖고 있답니다. (3) 일어번역은 서양학계에 알려지지 않아 그 정밀성에 대한 평가가 없으며, 새 번역출간 계획은 현재로서는 없답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디오게네스의 업그레이드된 텍스트와 번역출간 필요성에 대한 논의들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김재홍선생님께서 홀로 이 의미있는 번역작업을 준비하고 계신 것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생님의 작업에 더 큰 힘을 실어들여야겠다 여깁니다. (선생님, 힘내세요!) 저 자신도 디오게네스 7장 '스토아'에 주석서로서의 신빙성을 높이 평가하며, 이얀 키드(Ian Kidd) 교수가 이를 중기스토아 포세이도니오스 소스로 판단한 점을 감안하여, 학위논문 제출 후 텍스트 분석과 해석에 착수할 계획입니다. 하여 티치아노 교수 등 현재 작업을 진행하는 몇몇 학자들과 교류를 시작했고, 텍사스의 화이트 교수와 공동 작업을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화이트의 미출간 번역분을 입수할때마다 그의 허가 하에 김재홍 선생님과 정암에 전달하겠습니다.)
에고--한국말도 딸리는데 오래도 주저리주저리 얘기했네요 (죄송)--한숨 쉬고--아 참, 지난 4월 보스턴 고전철학회(APS)와 텍사스대 발표차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오스틴에서 유재민, 이윤철, 양호영 학형들을 만났지요. 다들 열심히 잘 지내는 듯하여 뿌듯하더군요. 학형들의 논문구상에 관해 한참 얘기들을 풀어놓다가 배가 고파서 삥 둘러앉아 라면끓여먹은 기억이 납니다 (역시 라면은 같이 먹어야 맛있어--음--윤철, 재민 학형, 고맙다. 라면 맛있게 끓여줘서). 벌써 한국은 여름에 접어들었지요? 강박사가 잠시 귀국했는데 회포들은 잘 푸셨겠지요? (술이 많이 고팠을 겁니다. 흠--평양냉면을 먹고오겠다 했는데, 군침이 도는군요.) 저는 요번 9월에 박사논문을 제출해야해서 올 여름은 케임브릿지 기숙사방에서 한국에서 온 미숫가루나 많이 타먹어야겠습니다. 정암학당 플라톤전집번역 일차분 출간을 축하드리며, 정암식구들 건강과 건투를 빕니다. 그럼 이만 총총.
케임브릿지에서 주은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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