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나눔터

2024. 05. 03.

/ 한 삽 뜰 때마다/

글쓴이: 서진희 날짜: 2008.01.07. 22:27:03 조회: 501 글쓴이IP: 59.9.83.144

/ 한 삽 뜰 때마다/

그때,

단대리 벌겋게 깎아놓은 산등성이 언덕에

세찬 비가 며칠 간 억수같이 내리더니

청계천에서 철거되어 여기저기 막 얼기설기 삶을 일구던

그들의 가슴에 패인 자국만큼이나 깊게 파인,

길게 쓸고 내려간 황토언덕을 다시 메꾸는 취로사업을 한다고

집집마다 일 할 사람 나오면 밀가루 한 포씩 준다고 하더군

우리 집에선 나갈 사람이 없어 할머니께 등 떠밀려 삽 한 자루 들고 국민학교 4학년이던 내가 나갔어

한 삽 뜰 때마다

이건 차지게 밀어 하얀 가래떡처럼 만들었다 석봉이 엄마보다 더 잘 썰어 떡국 수제비 해 먹고,

이건 물 적당히 넣고 걸쭉하게 반죽해서 숟가락으로 뚝뚝 떼어넣는 수제비 해 먹고,

이건 아까보다 좀 더 차지게 밀어 손으로 쫀득쫀득 떼어넣는 수제비 해 먹고,

이건 귀찮을 때 휘휘 저어 범벅 수제비 해 먹고.

이건 베이킹파우더로 부풀린 빵 만들어 먹고,

이건 막걸리 넣어 구멍 뻥뻥 나게 막걸리 빵 해 먹고,

이건 칼국수 해 먹고.

어스름 해질 무렵 받아온 밀가루로는

하얀 가래떡처럼 만들었다 한석봉 엄마보다 더 잘 썰어넣은 떡국 수제비는 할 수 없었지

검은빛 누런 코끼리표 밀가루...

흰빛을 그리워하는 아이들에게

하늘만은 기억했다 한겨울이면 어김없이 하얀 꽃선물을 내려주시던 그 때.

허름한 옷속으로 솔솔 들어오는 찬 기운도 잊고

강아지마냥 영란이, 영희와 흰 꽃밭에 뒹굴었던 그 때.

찌그러진 우리집 지붕에 핀 하얀 꽃이나,

매일 하얀 쌀밥만 먹던 파출서 서장딸 영란이네 지붕이나

똑같은 높이로 하얀꽃이 피어나던 그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