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나눔터

2024. 05. 15.

신화의 바다에 풍덩 빠졌습니다.

글쓴이: 임경미 날짜: 2009.08.07. 15:50:37 조회: 872 글쓴이IP: 58.141.110.212

1.
그가 뚜벅뚜벅 내게로 걸어왔다.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의 어느 부분에 밑줄을 그었나요?"
예기치 못한 질문으로 두어 번 침을 꼴깍 넘겼다.
그 틈새를 기다려 주지 않고 풍채와는 걸맞지 않은
그가 잽싸게 다그친다.
"책 안 읽었어요?"
방관자적인 수업태도로 낙인찍히기 싫어서 얼른 그의 물음표에
나의 답을 메달아 올렸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느껴야 할 보편적 감성이지요."
젊은 친구들 속에 섞여 있는 나는 결코 보편적인 학생은 아니었으리라.
교육의 과정을 역행하고 있는 내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들에게 거슬리지 않기 위해 등뼈를 구부렸다.
내가 그들보다 잘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그것은 그들보다 내가 등을 더 잘 굽힐 수 있다는 것이었다.

2.
~명작은 읽지도 않고 알고 지나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읽은 척 하는 지적 허구성을 버려라
고전은 시간의 부식작용을 견디어 낸 증거물들이다.
자기 주도적 학습으로 고전을 체화시켜라~

느릿느릿한 그의 말투가 무겁게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의 정서는 그의 느릿한 말투의 여백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의 감성은 날마다 고이는 샘터의 맑은 물처럼 찰랑거리며 빛났다.
나는 그렇지 못한 나를 비통해 하면서 비장하게 그의 샘에서 그의 빛나는 감각들을 퍼 날랐다.
그는 물론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 비통한 눈물의 발자국을 …….
세월이 그와 내게 선물한 흰머리의 성장 속도는 공평했지만, 그와 나의 샘은 공평하지 못했다.
무릅쓰고 견디리라.

3.
~쓰듯이 읽어라.
그것이 텍스트를 깊게 읽는 법이다.
인문적 지식은 요소적 독해가 아니다.
전체가 아울러지는 것이 인문적 지식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연신 긍정의 노를 저었다.

좌초되어 떠밀리고 있는 통섭교육의 멀미가 내게로 전이되고
나는 몸이 뜨거워진다.
내 갱년기의 관할에서 관리하는 온도는 결코 아니었다.
나는 다시 아득해졌다.
대한 뉘우스가 다시 부활된다는 극장 앞을 지날 때였다.

4.
~프로테데우스와 판도라
아폴론과 다프네
에코와 나르키소스
이아손과 메데이아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서사구조 작성하기를 과제로 받아 들고 광화문 거리에 섰다.
텍스트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포착을 포박하기 위해 나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동작을 더 유심히 살폈다.
가끔 저녁엔 무슨 반찬을 해야 하지? 내가 가스는 잠갔던가? 등의
잡념이 떠올랐지만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신화 속 인물들의 필수적 삽화를 마음으로 스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몸이 뜨거워졌다.
행복했다.
눈물이 났다.

5.
나를 빠져 나간 눈물에 대한 보상으로 제일 좋은 것이 술이다.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서사구조를 쓸 때는 메데이아의 피해의식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단순히 악행을 일삼은 마녀로만 굳어진 그녀의 캐릭터가 내가
마신 한 잔의 술잔 속에서 사랑에 배신당한 한 여인의
슬픈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산다는 것, 그것은 기다려주는 것이다.
내가 바뀌도록 내가 나를 기다려 주며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일이다.
저승으로 가는 배위에서도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눈물 흘렸던 나르키소스처럼…….
집 앞, 고속버스 터미널의 줄지어 선 꽃상가를 돌면서 뜬금없이 수선화를 찾았다.
마치 내가 당도하고 싶었던 젊은 날의 어느 시점을 찾는 것처럼….절박했었다.
절박한 것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6.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에서 결핍된 부분과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바꾸고 체화시킨 문학 작품 한 편과 트로이 신화의
시퀀스를 써 오기를 다시 숙제로 받았다.
물론 학점은 없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위해 2009년 여름을 송두리째 헌납 했다.
그와 내게 봉헌할 숙제를 준비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
그가 우리에게 진심으로 휘두르는 매를 맞고 싶다
줄이 쫙쫙 그어진 내 종아리의 통증으로 밤잠을 설치고 싶다.
나는 원한다.
그가 그의 학교 강의실에서 회초리를 들 수 있기를…….
그가 쓸쓸해하지 않고 신명으로 우리를 위해 매를 들 수 있기를…….
나는 맞고 싶었다.
비록 청강생이지만 죽살나게 얻어터지고 싶었다.

7
한국 예술 종합대학교 황지우 선생님의 명작읽기 강의의 청강생으로 2009년 나의 여름을 소모하고 있다.
이틀에 한 번씩 강의, 강의가 없는 날은 벅찬 과제에 나를 칭칭 묶었다.
한예종 사태로 강의실이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암담하다.
한국 예술 종합대학교의 명작읽기 강좌를 청강하면서 이미 문화교양학과의
'신화의 세계' 과목을 섭렵한 것이 엄청 도움이 되고 있다.
황지우 선생님의 강의 구비마다 이 정호 선생님의 철학 강의도 오버랩 된다.
앞으로 있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난 이 정호 선생님의 강의를 더 많이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 이미 익힌 강의들로 난 결코 주눅 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정호 선생님이 내게 주입한 인문학에 대한 열정의 전염 균을 보유한 보균자였으므로…….
우리 학교 시스템에서 부족한 실기 강의인 황지우 선생님의 강의도 잘 이겨내리라 주문을 걸어 두고 있다.

8.
나는 2009년 여름방학기간 동안에 사람이기를 포기한다.
나는 흡혈귀가 될 것이다.
황지우, 그의 심성에 내 감성의 빨대를 꼽고 그의 섬광 같은
신경조직을 쪽쪽 빨아댈 것이다.
그리고 가을엔 수혈 받은 내 피가 졸졸거리며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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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신화의 바다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지금 분석하고 있는 에피메테우스의 성격적 결함에서
저의 모습이 자꾸 보여서 잠시 휴식중입니다.
그 휴식 중에 교수님 강의도 생각이 나고 정암학당의 철학 강의도
떠올라서 이곳에 저의 강의 노트의 메모를 잠시 내려놓고
쉬었다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