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나눔터
ADMIN 2018. 12. 14.
 반백의 교수님과 후줄근한 제자의 우연
글쓴이: 임경미  날짜: 2010.09.09. 08:27:29   조회: 472   글쓴이IP: 58.141.101.29
연신내 시장은 재래시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활보하고 있어도 마음이 편한 곳이었다. 나는 끼니를 경계로 약을 먹어야 하는 내 위와 식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식당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한 무리의 아낙들 사이를 비집고 저 멀리 반백의 키가 작은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재래시장의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수수한 모습의 남자를 무심코 흘려 지나치다가 나의 시선을 의심하며 그를 향한 시선을 다시 확대하며 동공을 정지 시켰다. 

"교수님 여기 어쩐 일이세요?"
"아니 임 학우는 여기 어쩐 일로…………."

반백의 교수님과 후줄근한 제자는 연신내 시장, 지친 호박잎, 뒤틀린 깻잎, 마늘지 냄새가 진동하는 노점상 앞에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적들이 우글거리는 전쟁터 같은 서울 바닥에서 친애하는 그 누구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일은 참으로 축복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하고 많은 장소 중에서 반백의 교수님과 후줄근한 제자의 우연한 만남의 배경으로 재래시장은 더할 나위 없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그리 절묘할 수 가 있을 까! 라는 생각이 들어 출석수업 시간에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재래시장처럼, 사람이 무엇인지,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 지, 사람이 어떤 길을 가야하는 지, 같이 고민하게 하고, 재래시장의 사람들처럼 서로의 체온을 나누게 하는 강의를 펼치시는 지난 수업 시간들을 떠 올렸다.
 
"우리는 보리밥 먹었어. 어서 빨리 가서 먹고 와 !"

교수님은 ‘철학의 이해’ 출석 수업에 오셨고 점심을 드시고 오시는 길이라고 하셨다. 모름지기, 그 반 학생들 모두를 데리고 가셨을 것이다. 친근하고 삶의 진정성이 머무는 재래시장 같은 교수님과의 우연한 만남은 마치 누군가가 나에게 마지막 출석수업를 축하하는 뜻으로 보낸 선물처럼 느껴졌다.

보리밥을 앞에 두고 파르르했던 보리의 전생에 잠시 경건함을 보냈다. 내 위와 식도에게 모범적인 식습관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뙤약볕으로 김매러 나가야하는 며느리 궁둥이처럼 어기적거리며 식당을 나섰다. 그런데 학습관으로 들어가는 시장의 어귀에서 노점상들이 작은 자판을 사이에 두고 영역 다툼이 일어나고 있었다. 출석 수업에 늦을 텐데도 그 분쟁의 결과를 지켜보고 싶었다. 결국 그들은 조금씩 자신들의 자판을 접고 서로 양보하면서 영역 분쟁을 마쳤다.

봉은사 절 입구에는 구걸을 하는 걸인들이 늘 상주하고 있는데, 특히 오늘처럼 초하루는 그들의 대목이다. 이제는 그들과 눈인사도 트고 지낼 만큼 낯이 익었지만, 나는 얼마 전 까지 절에 가는 것 보다 그들을 통과하는 것이 너무 곤혹스러웠다. 가령 절 입구에 3명의 걸인이 앉아 있고 내 호주머니에 이천 원 밖에 없을 때, 때로는 두 명이 앉아 있고 호주머니에 천원 밖에 없을 때, 오지랖이 긴 나의 걱정은 ‘둘 만 주면 나머지 한 명은 어떡하지…….’ ‘한명만 주느니 아예 주지말자‘ 그들의 동냥바구니에 돈을 놓고 와도 걱정이고 돈을 놓고 오지 않아도 찜찜했었다.

그 날도 걸인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내 주머니에는 천원밖에 없었다. 나는 연장자격인 걸인의 동냥 그릇에 슬며시 천원을 밀어 넣었다. 그리곤 저 만치 가서 내가 돈을 넣지 못한 걸인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 것을 예상하며 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나에게 돈을 받은 걸인이 자신의 동냥 그릇에서 오백 원을 꺼내서 옆의 동료에게 건네주었다. 이미 그들 사이엔 공존의 질서와 공생의 철학이 두터워져 있었던 것이다. 콧등이 시큰했다. 그리고 나에게 속삭였다  '아직 멀었다 너는. 더 숙여라 ' 그 뒤로 그들은 나의 부처가 되었고 그들과 더 가까워졌다. 오늘도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연신내에 도착했다.
 
연신내 시장에서 보았던 노점상들의 공생과 공존의 모습에서 절 앞, 걸인들의 환한 미소를 떠 올렸다.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덕분에 출석수업의 지각은 당연했다. 저렇듯 이 세상 낮은 것들로부터의 울림은 내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둔 양심을 춤추게 한다. 그리고 나를 확장시키고 때로는 서늘하게 만든다.

그러나 나를 눈물 나게 하는 아름다운 것들이 나에게 하나의 풍경일 때, 풍경 속의 그들에게는 눈물 나는 아픔이고 그것이 거부할 수 없는 그들의 처절한 삶이라는 자각으로 온 몸이 서늘해질 때, 그곳에서 더 이상의 그 어떤 감성과 결이 고운 정서를 추출해 낸다는 것은 사치스런 감정과 지적 허영이므로 내 속에서 분출되는 더 이상의 감성적 발기는 단호히 거세시켜야 했다. 그리고 감히 아름답다는 말로 쉽게 치부해버린 지난날들의 나를 질책했다. 그래서 그런지 솔직히 요즘은 이런 자책과 지난 날, 내가 가볍게 흘린 말과 행동들로 글쓰기도 두렵고 말하기도 두렵다. 그런 기억들이 합류하는 날들이 잦아지고 그럴 때마다, 내 삶을 중화시키지 못하는 집착의 역류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도 오늘은 연신내 시장, 태풍에 지친 호박잎, 햇살에 뒤틀린 깻잎, 세월에 짓눌린 마늘지 냄새로 우리네 삶이 익어가는 가을의 길목인 백로에 늙수그레한 제자가 반백의 노교수를 우연히 만나서 행복했던 날이다. 여름의 안간힘과 가을의 당당함이 연신내 시장의 노점상들처럼, 봉은사 정문 앞의 걸인들처럼, 서로서로 양보하며 계절의 영역을 나누는 바람조차도 공존했던 날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교수님의 공존과 나눔에 대한 지난 강의를 다시 떠 올리며 다시 낮아지는 법을 배운다.

내일은 지난 수업의 추억을 떠올리며 출석시험에 대한 부담 없이 긴장을 풀고 펑퍼짐하게 앉아서 이 정호 교수님의 ‘철학의 이해’ 강의를 다시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때 부지런한 가을 햇살이 나의 등에 와서 잠시 머물러 준다면, 그 나른함을 핑계로 꾸벅꾸벅 졸아 볼 수 있는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것 또한 그 무엇과 견 줄 수 없는 행복일 것이다.



음력 8월1일 백로에
 
LIST  MODIFY DELETE WRITE  





전체글 목록 2018. 12. 14.  전체글: 1482  방문수: 721986
4780 햇병아리생각 박래길 2016.03.03.379
4777 구 홈페이지 [생각나눔터] 복구 안내 이정호2015.05.07.343
4769 멋진 교수님^^ 은희~^^2010.09.13.383
4761 내가 더 나이 들면.. 황현옥2010.09.12.424
4760 내겐 특별한 보리밥~ 최미경 2010.09.12.387
4750 문성근님을 만나고 맘 속에 떠오르는 러셀...^^* 이옥심 2010.09.09.357
4749 반백의 교수님과 후줄근한 제자의 우연 임경미2010.09.09.472
4745 교수님~ 정말 오래간만에 인사드려요^^ 혜수^^2010.09.08.342
4732 교수님 안녕하세요 권희숙2010.09.01.357
4731 나는 배웠다/ 샤를르 드 푸코 학생2010.09.01.526
4729 정암학당 9월의 교양강좌 이순이2010.08.31.346
4719 멋진 교수님 화이팅!! 정경회2010.08.24.394
4704 아노도스 8월 정모 <파이돈> 이순이2010.08.20.351
4701 정암학당 8월 교양강좌 이순이2010.08.18.416
4687 re: 이정호 교수 [철학의 이해] 출석수업일정 이정호2010.08.13.309
4679 브레이트 이 시는 어떠세요?-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최경란2010.08.11.362
4678 칸트미학의 이해 최경란2010.08.11.275
4673 서울시의회, 교육청...그리고 '깨어 있는 시민' 이옥심 2010.08.08.225
4661 '영화로 생각하기'이 과목의 영화로 인셉션이.. 이현우 2010.08.03.299
4655 교수님 감사합니다 최 원숙2010.08.02.277
4653 교수님~ ^^ 허진영 2010.08.01.203
4652 교수님 인사말을 보고 최경란 2010.08.01.267
4636 소크라테스적 대화~ 이순이2010.07.26.212
4633 교수님고맙습니다. 유영자 2010.07.25.190
4631 플라톤...어려움을 즐거움으로...^^* 이옥심 2010.07.25.240
4618 교육학과 3학년 편입생입니다 박정미 2010.07.21.244
4617 늘푸른 하늘 늘푸른 하...2010.07.21.217
4611 매력 만점 헤라클레이토스 이순이2010.07.19.205
4615 re: 함께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이정호2010.07.20.166
4602 교수님께 감사 드립니다. 고경효 2010.07.17.223
RELOAD WRITE
1 [2] [3] [4] [5] [6] [7] [8] [9] [10]  ▶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