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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이가 난데없이 인터뷰를 하자고 졸라댄다. 학교의 수행평가 과제물 작성의 일부분이란다. 이른바 부모님의 학창 시절의 일화 중 인상적인 부분에 해설을 곁들인 평전 형식을 엮어 내는 것. 귀찮은 생각에 퉁명스럽게 대충 대꾸하던 사이, 어느새 마음속에서는 아스라한 유년의 기억에 대한 추억의 집이 차곡차곡 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감귤 사건에 이르러서는 방바닥을 구르며 눈물이 찔끔거리도록 웃음보가 터지고야 말았다.
몇 천원어치의 과일이 야채 박스 안에서 그냥 시들어지거나 썩어 나갈 만큼 먹을 것이 흔해지고, 스낵이나 다른 먹거리에 더 익숙해진 아이에게 제 엄마의 감귤에 얽힌 추억은 엽기적이라 할 만큼 인상적이었는지 그 부분을 주제로 엄마의 학창 시절 일화를 근사하게 작성해 주겠노라고 큰소리를 치며 재탕 삼탕 이야기를 듣고서도 아이도 방바닥을 구르며 웃음을 참지 못한다.
유년시절 우리 집엔 늘 군식구가 끼어 있곤 했는데, 중학교 때는 사촌이 두 명 함께 살고 있었다.
학구열이 강하고 공부 욕심이 많았던 아버지는, 당신이 어렵게 공부했던 터라 생활이 어렵고 자식이 많은 둘째 형님 댁 큰아들, 즉 사촌 오빠 한명과 사촌 여동생 한명을 데려다 오빠는 학교에, 여동생은 미용학원에 미용 기술을 배우러 다니도록 하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교직에 계셨던지라 방학이면 두 분이 여행을 가시거나, 시골 큰아버지 댁을 다녀오시는 등 방학 때 오히려 외출이 잦은 편이었다.
중학교 겨울 방학 때, 부모님은 맏이인 나를 대장으로 명하시곤 며칠간의 여행길에 오르셨고 우리는 모처럼의 아이들만의 해방의 시간들을 느긋하게 즐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어떤 분이 감귤 한 상자를 들고 찾아오셔서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
지금은 가장 흔하고 값싼 천덕꾸러기 과일이 된 감귤이지만 그때는 금귤이라 할 만큼 귤이 귀하던 시절이 었다. 그때만 해도 감귤 나무가 그리 흔하지 않았던지 제주도에서 감귤나무 서 너 주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던 말이 돌 정도였으니 감귤이 얼마나 귀한지 상상이 갈 것이다.
아버지는 내게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받지 말라고 단단히 다짐을 두고 가셨기에, 절대로 받을 수 없다고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그 분은 “제자인데 먼데서 인사차 들렸으니 받아도 아무 상관이 없다.“며 떠맡기다시피 귤 상자를 놓고 가셨다.
처음엔 그저 마루 한 귀퉁이에, 보릿자루인양 귤 상자가 얌전히 놓여져 있었고 아무 탈없이(?) 무사히 하루가 지나갔다.
見物生心 이라던가? 한 귀퉁이에 놓인 귤 상자를 오며가며 보면 볼수록 한개만 먹어 봤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슬그머니 일기 시작했고, 그 욕망에 제일 먼저 꼬리를 내린 것은 어이없게도 모두의 일신을 책임 맡은 대장격인 바로 나였다.
한살 터울의 친구 같은 사촌 여동생과, 내 여동생까지 여자 아이 셋이 모이니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발동을 했고 거기에 대담성까지 생겨 일은 그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던 것일까?
“야, 귤 정말 맛있겠다, 그치? 우리 저 귤 딱 하나만 꺼내서 먹어 볼까? 하나쯤은 엄마가 절대 모르실 거야. 이거 먹은 거 우리끼리 비밀이다, 알았지?” 음모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우리는 귤을 하나 조심스럽게 꺼내서는 셋이서 신나게 나누어 먹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그 귀한 귤을, 그것도 하나를 가지고 셋이 나누어 먹었으니 성에 찰 까닭이 없었다. 거기다 새콤 달콤한 혀의 미각은 자꾸만 사건의 확대를 부추기고 우리는 이성을 잃은 채 혀의 욕망을 따라 먹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딱 하나만 더 꺼내먹자, 딱 한 개인데 뭐” 그렇게 시작된 귤 시식은 어이없게도 누가 빨리 먹나 내기를 하듯 하나라도 더 많이 먹으려는 경쟁심까지 발동시켜 어느덧 귤 한박스의 바닥이 보이고서야 끝이 나고 말았다.
“어? 없잖아, 언제 다 먹었지? 큰일 났다. 엄마한테 야단 맞을텐데...” 그렇게 걱정을 한 것도 잠시, 우리는 또 기발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 내곤 즐거워라 깔깔거리며 곧 실행에 옮겼다.
당시 우리 집은 절충식 양옥이었는데 집들이 마주 보이는 골목길에 보도 블럭이 깔려있고 집 앞에는 쇠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견고한 콘크리트 쓰레기통이 하나씩 있었다.
70년대 이따금씩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그 쓰레기통을 비워서 리어카에 싣고 가곤 하던 기억이 있는 분도 계실 것이다. 엽기적인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귤을 한 상자나 먹었으니 껍질이 커다란 쟁반에 수북하게 쌓였고 셋 중 하나가 망을 보고 있다가 골목길에 사람들이 골목길에 들어서면 신호를 한다, 그러면 귤껍질을 버리는 것처럼 쟁반 째 들고 나갔다가 사람들이 쳐다보고 지나가면 다시 들고 들어오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일종의 자랑인 셈이었는데 사람들이 귤껍질을 보면서 “ 저 집은 비싼 귤을 많이도 먹었네.” 라며 몹시 부러워 할 것이라는 아이들다운 계산을 했던 것이다.
먹거리가 귀하던 시절이라 철없는 아이들의 생각으로 우리가 대단한 부자라도 된 듯, 자랑을 하고 싶음에서 비롯된 유치함이었다.
그날은 아마도 열 댓 번도 넘게 귤껍질을 들고 문 앞을 나갔다 들어왔다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부모님이 오시자마자 그 신나던 놀이와, 혀끝의 미혹의 대가로 부모님께 된통 꾸지람을 들은 것은 물론 회초리까지 맞았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옆집서 떡 한 조각을 가져와도 제일 웃어른인 아버지가 오시기전에 먼저 손을 댄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옆집서 무엇을 가져오면 아버지가 퇴근하기 전까지는 절대 맛을 보여 주신 적이 없으셨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란 덕에 전에는 단 한번도 그렇게 엉뚱한 마음을 먹은일 조차 없었는데, 책임을 맡은 맏이로서, 더군다나 어른들이 안 계신 동안 알지도 못하는 분이 가져다 놓은 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었으니 호된 꾸지람은 당연히 예정된 순서가 아니겠는가?
그 사건 이후로 단 한번도 그런 일로 꾸지람을 들은 적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값비싼 수업료를 치른 대가는 충분했다고 생각된다.
요즘 가정에서는 어른의 몫을 챙기는 것,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든 후에 아이들이 수저를 드는 일 등, 어른을 공경하는 태도나 어른들에 의한 규율의 전통이 사라진지 오래다.
오죽하면 반찬도 아이들의 구미에 맞추니 아이들이 상전이라는 등, 입시생이 있는 집에서는 황제나 황후를 모시고 살아 숨도 크게 못 쉰다는 등의 말들이 오갈까?
모든 것을 아이들 위주로 챙기다 보니 가정교육의 부재를 염려하는 시각들도 만만치 않다.
부모 자식간에 친밀감이 생기고 친구처럼 가까워진 반면, 어른에 대한 예의나, 기본적인 공중 생활의 덕목이 상실되어 길거리나 음식점서 눈살이 저절로 찡그려지는 일이 생기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식당에 가서 음식이라도 먹을라치면, 아이들이 제멋대로 식탁 사이를 뛰어다는 것은 보통이고, 어떤 아이들은 음식을 놓는 식탁 위를 겅중거리며 뛰어다니기도 한다.
제멋대로 전등을 껐다, 켰다 하는가 하면, 아무데나 벌렁 누워 소리를 지르고, 다른 사람 앞을 어슬렁거리며 빤히 쳐다보기도 한다.
그런 것을 보고도 야단을 치거나 주의를 주는 부모를 거의 보지 못했다.
야단은커녕 다른 이들이 불쾌감을 참지 못해 뛰지 말라거나, 좀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면 아이의 부모들은 오히려 “우리애가 뭘 하던 당신이 무슨 참견이냐? 왜 남의 아이를 야단치느냐?”며 아이 역성을 들고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외식을 한번 하려해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핏자나, 햄버거, 치킨 등 아이들의 기호에 따라 어른들은 대부분 양보의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 아니면 아이들은 먹고 어른들은 집에 와서 있는 밥에 대충 챙겨 먹기도 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할 수 없는 삶의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함께 사는 방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바로 그 일일 것이다.
내가 감귤 한 상자를 먹은 일로, 호된 꾸지람과 함께 매서운 회초리를 맞은 것은 그 일을 통해서 중요한 삶의 덕목 하나를 단단히 각인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 후로도 난 여전히 감귤을 좋아하고 잘 먹는 것으로 미루어 그 체벌에 대해 어떤 앙금이 남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교육이란 어떤 형태로든 감사함으로 남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인간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성품이나 사회성이 유년에 거의 형성이 된다고 하니 가정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가정에서 더불어 사는 모습, 남을 배려하는 모습, 어른들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모습, 내가 싫어하는 것은 상대방도 싫어한다는 것 등을 가르친다면 아이와 어른 모두 행복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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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 한 상자
교수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