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나눔터

2024. 04. 29.

공단

글쓴이: 가로등 날짜: 2002.07.25. 01:29:04 조회: 500 글쓴이IP: 218.148.21.238

비 내리는 휴일. 전철은 붐 빈다. 사람냄새가 전철 안의 긴 공간을 묵직하게 메우고 있다. 엄마 등뒤에 업힌 아이는 오래 울어 얼굴이 붉다. 아이 옆에 서 있던 낯 선 아주머니가 안타까운 마음에 아이의 등을 토닥이고, 아이엄마는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연하게 얼굴을 붉힌다. 사람들의 시선은 창 밖, 혹은 타인의 머리 뒤 꼭지 정도에 고정되어 있다. 우리 모두는 전철과 함께 좌우로 몸을 흔든다. 저마다 손에 들린 짧거나 긴 우산에서는 물방울들이 심심한 듯 이리저리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린다.

전철이 가리봉 역을 지나 인천을 향해 달린다. 철교 아래 위치한 그 곳의 건물들은 굳은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사각형이다.
세모모양으로 솟아오른 지붕도 없고, 기와와 같은 장식을 얹거나, 허리에 운치 있는 발코니를 걸친 건물도 없다. 그저 사각형이다. 밤이면 수많은 취객들이 끌어안고 토악질을 해댔을법한 낡은 전봇대가, 비로 인해 더욱 무거울 전깃줄들을 위태롭게 붙들고 서있다. 사각 건물의 마당에 세워져 있는 자동차들은 오래 전부터 그곳에 북 박혀 있던 모형처럼 질서 정연해서 거꾸로 확 쏟아도 꼼짝도 하지 않을 것 같다.

공단.
텁텁한 공단의 냄새가 전철 안에 서 있는 내 가슴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기억을 부른다.
오래된 전동 타자기의 성긴 쇳소리, 펄쩍 뛸 듯 울리는 전화 벨소리, 마루 바닥을 톨톨 끌며 지나가는 슬리퍼 소리들을...

"공단을 지나고있어. 웬일인지 내 청춘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 라고 누군가에게 고백이라도 하고싶어진다.

어쩌면 타인이란 말은 단어로만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존재들은 결코 타인일 수 없으리라. 나를 스쳐 지나가는 자의 향수(鄕愁)와 나의 그것이 닮았다면 전봇대가 낡은 전깃줄을 붙들고 서서 세상을 견디고 있듯이 나도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누군가를 붙들고 "당신도 그렇지요?"라고 동의를 구하며 살고싶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내가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