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확실히 미치면, 길이 보인다
[서평] 이명희의 <여자로 태어나 미친년으로 진화하다>
이명옥(mmsarah) 기자
이 시대를 가장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미친년' 몇 명을 직접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된 것은 페미니스트 자매들을 따라다니며 이곳저곳을 열심히 기웃거린 덕분이다.
가부장제라는 철옹성에 갇혀 있던 여성들 중 유난히 자아 정체성이 강한 여성들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어쩌면 그 뜨거운 호기심은 우리의 '왕언니' 이브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그 이브의 후예들인 수많은 자매들 중 꼴리는 대로 사는 많은 여성들은 '미친년'의 선봉에 서서, 아름다운 진화의 참모습을 보여줬다.
미친년들에게 필이 꽂혀서 자신도 미친년이 되고 싶어 하는 이명희는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9명의 멘토를 만나 9가지 인생을 스케치한다. 그가 많은 이들에겐 아직 낯선 '미친년'이란 단어를 스스럼없이 제목에 붙이고, 21세기 페미니즘의 최선봉에서 기염을 토하고 있는 진짜 멋진 여성 8명을 인터뷰하도록 불씨를 당긴 사람은 '미친년 프로젝트'의 사진작가 박영숙이다.
그가 얼마나 미친년에 천착을 했는지 9명에게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한 질문은 '당신은 살면서 미칠 것 같은 순간이 있었는가? 어떻게 그 순간을 극복해 왔는가?'이다. 9명은 한결같이 당당하게 대답한다. '미칠 것 같은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고 하고 싶은 일을 주저 없이 하라'고.
페미니스트들이 꿈꾸는 건 '둥근세상'
많은 이들은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남성으로부터 무언가를 탈취해서 여성 자신이 향유하려는 자들이며 질서에 반하는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급진주의자들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생명을 지닌 모든 것, 특히 사람들 모두가 둥근 원탁에 앉아 함께 음식을 나누고 함께 손잡고 노래하는 세상을 꿈꾸는 휴먼니스트들이며 낭만주의자들이다.
성적 소수자, 장애인, 어린이, 노인, 아슬람과 기독교, 화이트 피플과 블랙 피플이 성, 인종, 국경, 종교의 다름으로 차별받지 않는 사회, 연약함과 강함, 부드러움과 강함이 서로를 헤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사회, 어느 누구나 어디서나 같은 거리에서 같은 눈높이로 서로를 바라보고 격려하는 사회, 각자의 다름이 차별이 아니라 장점과 개성이 되는 사회, 바로 그것이 페미니스트들이 꿈꾸는 둥근 세상인 것이다.
그는 동서를 가로질러 다양한 분야의 페미니스트들을 인터뷰한다. 그들은 미친년 소리를 수없이 들어가며 자신들만의 인생을 꼴리는 대로 살아 그 분야에서 우뚝 서 길잡이가 되어준 여성멘토들이다.
'미친년 프로젝트'로 미친년이라는 화두의 불씨를 당긴 사진작가 박영숙과 70년대 여성운동의 대모인 글로리아 스타이넘, 집안 말아먹을 년, 미친년, 못생긴 년, 등 온갖 차별과 모욕 속에서 등대처럼 우뚝 선 실리콘 밸리의 CEO 김태연, 여성의 몸에 대한 금기를 깨고 여성들을 해방시킨 이브 앤슬러, 종교의 벽을 넘어 평화의 메신저가 된 에코페미니스트 현경, 레즈비언 여성사제로 카톨릭의 금기에 도전하는 여성사제 빅토리아 루, 정말로 미치지 않고 살려면 360도 완전히 미쳐야, 진짜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된다고 조언하는 묘지스님, 좋은 엄마, 착한여자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정말 인간으로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라는아티스트 윤진미, 페미니스트 잡지 <이프> 창간으로 한국 페미니즘 운동에 한 획을 그은 후 말랑한 글쓰기를 통해 심청과 바리데기를 페미니즘 시각에서 환생시킨 저널리스트 류숙렬 등이 이명희가 만난 멋쟁이들이다.
미치지 않으면 길이 보이지 않는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살겠다'고 '가족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혹은 남편과 자녀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면 그것을 휴머니즘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사실 휴머니즘이 무엇인가. 사람으로 사람답게 자기안의 울부짖음에 귀 기울여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던가.
제도와 자본, 권력이 사람의 위에서 사람의 삶 자체를 구속한다면, 그것은 휴머니즘이 아닌, 폭력이 되는 것이다. 위의 미친년들은 바로 제도의 억압으로부터 먼저 자기 자신들을 해방시킨 여성들이다.
그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수많은 여성 자매들에게 훌륭한 모델이 되어서 많은 여성들이 사람으로 살기를, 자기 자신으로 살기를 열망하게 되었고 그 열망을 따라 살면 세상은 그들을 미친년이라 부른다. 그러나 미친년이 될 때, 자매들은 비로소 그녀들 앞에 놓인 길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을 주저 없이 걸은 미친년들은 이제 그 길로 자매들을 인도할 수 있는 멘토들이 된 것이다.
레즈비언 여성사제 빅토리아 루는 말한다.
"사람은 모두 흔들리며 성장하는 것이다.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흔들린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이다. 흔들림이 지나쳐 미칠 것 같은 순간에도 나는 나를 믿었다. 나보다도 더 극한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다다른 어머니를 생각한다. 고통은 생각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한 생각을 바꾸면 고통도 사라지고, 나의 진실한 목소리에 미쳐 마침내 나를 보는 게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 극한의 한계를 버텨낸 수많은 이브의 후예들, 그들이 자신들의 진실한 목소리에 미쳐 오롯이 자기의 길을 찾을 때 비로소 진화는 시작되는 것이다.
미친년이 꿈꾸는 진화를 향하여
미친년하면 나는 시인 고정희가 노래한 미친년이,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 나온, 이념의 벽을 넘어선 미친년이, 식칼을 들고 자기를 잃어버린 박영숙의 미친년이 떠오른다. 그들이 결단코 미친년일 수 없으면서 또 미친년 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은 오롯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가슴을 열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품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으로 태어나 미친년으로 잔화하다>를 접한 이들은 미친년의 속내를 엿 본 대가로, 아마도 용기 있게 미친년의 길 위에 서기까지 아주 오래오래 방황의 가슴앓이를 할런지도 모르겠다.
-----------------------------------------------------------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구는 바로, '사람'"
[인터뷰] <여자로 태어나 미친년으로 진화하다> 저자 이명희
- 페미니스트를 나쁜 여자나 악마로 폄훼하는 한국의 풍토에서 미친년이라는 거친 제목을 붙이면서 주저함은 없었는가?
"전혀 없었다. 사실 제목이 더 거친 부분이 있었는데 아카데미 버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정민 선생님의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가부장 사회에서 자기 일에 미친 여성들이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까. 사회적 편견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미친년이라는 사회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자기 분야에서 몰두하는 여성들을 만나서 '미친년'이라는 제목을 서슴없이 붙일 수 있었다."
- 우리 시대 수많은 여성 선각자들 역시 미친년으로 불려졌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9명의 미친년으로부터 무엇을 가장 배우고 싶었는가?
"사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인간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진정한 프로의 세계에서는 성이 거세된다고 생각한다. 남성과 여성은 덜 진화된 분류법이고 실질적으로 장인정신에 몰입되어 자기 분야에서 쟁이가 되어 있는 프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페미니스트란 휴머니스트로 나아가는 과정에 붙여진 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성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휴머니즘에 동참하는 사람이다. 휴머니즘을 학문이 아닌 대중적 코드로 다가가고 싶었다. 상아탑의 사람들이 자위행위처럼 즐기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고 무릎을 탁 칠 수 있는,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9명은 자기의 한계를 운명이라고 체념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를 극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이야 말로 휴머니스트들이 아닌가?"
- 아름답게 미친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자기를 놓지 않는 사람, 자기중심적인 부분을 철저하게 통찰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 가는 게 아니라 타인과 함께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을 꿈꾸며, 꿈을 이루기 위해 종교, 나이, 성을 초월하여 실천하는 사람, 즉 사람이 된 사람들이어야 한다.“
- 준비하는 작품이 있나?
"다음 프로젝트는 '빛'이다. 미친년에서 진화하여 빛이 된 사람들, 무소의 강한 뿔을 가지고, 한계를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 전공이 국문학으로 알고 있다. 자기의 목소리로 정리된 자기만의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은 없는가?"
"그런 열망이 너무 강하다. 나의 궁극적인 화두는 '사람'이다. 나는 이제 남의 각주 붙여서 논문 쓰고 남의 것 베껴내며 상아탑에서 자위행위를 즐기는 것이 아닌 진짜 사람의 이야기를 내 목소리로 쓰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의 냄새를 맡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살다보면 진정성을 찾아 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의 세상을 바라보는 창구는 바로 사람이다." / 이명옥
여자로 태어나 미친년으로 진화하다/이명희 지음/열림원/11,000원
2007-08-20 20:06
ⓒ 2007 OhmyNews
|
|
확실히 미치면, 길이 보인다
철학을 알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