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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5. 17.

기연할머니

글쓴이: 서진희 날짜: 2008.01.10. 20:25:28 조회: 479 글쓴이IP: 59.9.83.55

/기연할머니/

기연할머니가 다녀가시는 날에는
일회용 비닐봉지에 거뭇거뭇 콩밥과 김장김치 한 포기가
썰지 않은 채 길게 들어있는 날이다.
집에서 먹는 것처럼 길게 주욱 찢어먹어야 더 맛나다는
할머니 말씀에 따라 혼자 주욱 찢어먹고 있을 때
어디에 숨어 있나 나타났는지 소쩍새 한 마리도 야금야금 함께 파먹던 날이다

기연할머니가 다녀가시는 날에는
시커먼 비닐봉지에 집에서 쑤었다고 새알 잔뜩 든 붉은 팥죽이 들어있는 날이다
퉁퉁 불어터진 새알만치 차가운 팥죽을 꾸역꾸역 넘기던 내 가슴도 불어 터진 날이다.
그날 밤 자르륵자르륵하는 소리가 내내 들려 잠을 못 이루었는데 돌아가신 울 할매
길고 긴 동짓날밤 베 째는 소린가 했다

기연할머니가 다녀가시는 날에는
기연할아버지가 일하시는 농수산물시장에서 상인들이 내다버린 생선 중
제일 싱싱한 놈으로 골라 낸 조기 몇 마리와 갖가지 생선들이
펄떡펄떡 되살아나 꿈틀대는 날이다
함께 따라 온 할머니의 마음을 다른 식구들은 아무도 먹지 않아
혼자만 살금살금 냉동고에 숨겨두고, 외로울 때마다 킁킁한 할머니의 냄새를 맡으며 먹는 날이다

기연할머니가 다녀가시는 날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귤을 만나는 날이다
까내기도 힘든 단단한 겉을 겨우 까내면 달디 단 즙은 다 말라버린
허벅허벅 바람이 숭숭 뚫린 기연할머니의 오랜 세월 같아도
살아오면서 저토록 맛난 귤은 먹어본 적이 없다

남들이 혹 알아서 그런 것도 다 촌지인데
받으면 안되지해도
기연할머니가 갖고 오는 촌지만은 거절하는 법을 모르겠다

남들이 계속 그래도 그러면 안되지라고 나무라면 그땐
아이들 없을 때 할머니께 덧셈,뺄셈 가르쳐 드린 수업료라고 발뺌하는 수밖에.

*오늘 낮에 기연할머니가 또 다녀가셨어요~~ 마침 제가 할 일없이 글 쓰고 있을 때 오셔서 썼던 글 읽어드렸더니~~ 다 살아가던 이야기네~~그럼 내 이야기도 쓰는 거야? 하시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