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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홈피에 들렀다가 우리 문화교양학과 [영화로 생각하기] 대표저자이자 강의교수이신 동아대 이병창 교수의 글을 퍼왔습니다. 하수상한 세월, 한참 눈을 멎게 하는 글이어서..
"우리가 혼자 떠도는 단어들 몇 개를 합쳐줄 수 있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나아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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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한 학기 강의가 끝났다.
강의 준비에 바빠 내팽겨 두었던 일들을 다시 해야 되겠다 생각은 하지만 신경이 풀어져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이럴 때는 영화나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인터넷을 뒤저 대번에 고른 영화가 바로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영화이었다.
이 제목을 보고도 어찌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주제 사라마구가 원저자라고 하지 않던가?
영화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영화를 보며 내내 이 무슨 서부 영화의 패러디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눈은 자꾸 시계를 바라보았다. 관객이 없어서인지, 영화 상영을 늦은 밤에만 했었다. 그때 까지 기다렸다는 게 억울했다.
지난 주말 우연히 바닷가로 갔다. 거기에는 바다가 있고, 전시관과 화랑도 있고, 아예 영화관(시네마테크)과 서점까지 갖추어져 있어, 완벽하게 휴일이 보장되므로, 자주 산책 나가는 곳이다.
산책 중 영화관에 들렀으나, 볼만한 영화가 없어 아쉬움 때문에 서점에 들렀다가 ‘눈뜬 자들의 도시’라는 책을 발견했다.
어이없게도 나는 이 책이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영화의 원전인 줄 알았다. 작가였던 주제 사라마구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던 거 같다. 그는 혁명가로서 활동했다는데 말이다.
자책감을 보상하기 위해 영화 때문에 이미 별로 재미없을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된 이 책을 읽기로 했다.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단번에 이해했다. 왜 영화가 엉터리였는지 말이다. 그것은 감독의 잘못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영화의 한계이다. 소설은 빛나는 알레고리로 가득했다. 그러나 아다 시피 영화는 근본적으로 알레고리를 표현할 수 없는 게 아니냐.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이란 영화가 이 대목에서 생각난다. 아마도 알레고리를 영화적으로 실험해보았던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영화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 영화의 알레고리는 그때 그 시절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우리 세대에게나 전달될 수 있겠지. 외국인이나 그 시대를 모르는 젊은이들은 아예 이 영화가 알레고리를 깔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것이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감독은 낙관적이었다. 어쩌면 너무 영웅주의적 냄새가 나서 오히려 싫었을 정도이다. 그 도시에는 적어도 한 명의 눈뜬 자가 있었고, 그는 나머지 눈먼 자들을 구하기 위해 살인조차 범하면서, 끝내 눈먼 자들을 살아남도록 해 준다.
그런데 그 영화와 비교해본다면, 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소설가는 오히려 절망적이다.
소설 속 나라의 수도에서 대부분의 주민들이 선거에서 백지투표를 행한다. 우파와 중도파, 그리고 좌파의 정당에 대한 지지표는 극히 일부분, 나머지 대부분은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은 백지투표이다. 정부는 이 사태를 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백지투표를 자행했을지도 모를 자들을 한 오백 명 정도 체포해 조사하지만 어떤 성과도 없었다.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도시로부터 철수한다. 도시에 대한 정부의 보호조처를 철회함으로써 도시주민이 정부의 고마움을 깨달을 때까지 내버려둘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에는 정부가 기대했던 어떤 혼란도 없었다. 평온하고 활기 있게 도시의 삶이 유지되자, 초초해진 정부의 총리와 내무부장관은 하나의 작전을 세운다. 그 작전은 곧 백지투표를 조직한 배후세력을 조작하는 것이었다.
이 장면에서 작가 사라마구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스토리와 이 소설을 연결시킨다. 즉 내무부장관은 당시 유일한게 눈을 뜨고 있으면서 일단의 눈먼 자들을 구해냈던 의사부인을 이 배후세력으로 지목한다. 내무부장관은 신뢰하는 부하 경찰을 파견해서 그 증거를 찾아내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파견된 경찰은 끝내 증거를 찾지 못하고 내무부장관에게 그녀의 무고함을 보고하자, 내무부장관은 그에게 그러면 증거를 조작해 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내무부장관은 부하 경찰이 찾아낸 사진, 즉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구해진 사람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감추어진 배후세력의 모습으로 신문에 대대적으로 선전하자, 그는 양심의 고통을 받으면서 내무부장관의 음모를 폭로하게 된다. 결국 그는 살해되고, 소설은 내무부장관이 살해된 그를 배후세력을 찾은 영웅으로 추서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물론 유일하게 눈뜬 자였던 의사부인도 그 남편도 살해되고 만다.
작가는 이 소설을 비극적으로 끝나게 했다. 그래서 절망적이다.
이 소설도 스토리만 보면 역시 평범할지 모른다. 그러나 소설의 힘은 이 스토리를 묘사하는 언어 즉 빛나는 알레고리에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맹목적으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가는 이 시대에, 나이가 들면서 젊었을 때 꿈꾸던 것과 달리 돈도 많이 벌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를 만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이런 남자와 이런 여자들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거울 앞에 서서 매일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라는 가래로 과거의 자기 모습이라는 얼굴에 침을 뱉고 있다. (143쪽)”
그런데 이 소설에서 나의 마음을 울리는 말은 사라마구의 모럴에 있다.
이 소설의 정점은 내무부장관이 보낸 부하 경찰이 마침내 사건을 폭로하기로 결심하는 데 있는데 이때 유일하게 눈 뜨고 있었던 의사부인은 그들을 도와주는 경찰에게 묻는다.
“ 왜 우리한테 이렇게 해주는 거죠? 왜 우리를 돕는 거예요?
책에서 읽은 것 때문이오. 오래 전에,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며칠 전에 생각이 났소.
그게 뭐죠?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
좋네요. 생각을 자극하는 말이에요. 그 책 이름이 뭐지요?
창피한 이야기지만 기억나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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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 단어들이 서로를 잃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그 단어들은 자신들을 합쳐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누가 알아요. 우리가 혼자 떠도는 단어들 몇 개를 합쳐줄 수 있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나아질지.“(377쪽)
이 간략한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스스로 서명하지 않은 협정을 지켜야 하는가? 사라마구는 단호히 말한다. 이미 서명한 것이다. 비록 나대신 다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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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이병창
[서평] <아담을 기다리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