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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5. 18.

커피 한 잔의 사치, 그 작은 변명

글쓴이: 이명옥 날짜: 2006.10.08. 21:15:26 조회: 448 글쓴이IP: 58.233.226.84

커피 한 잔의 사치, 그 작은 변명
가을은 차의 향기가 유난히 그리운 계절
이명옥(mmsarah) 기자

커피 내리는 여인

잘 익은 암갈색 열매가
길고 하얀 손가락을 돋보이게 한다.

오랜 시간 자기 안에 고여
윤기나는 돌이 된
감정의 응어리를 갈고 있는 걸까
시름마저 점차 엷어져
오히려 진한 향기로 변한다

얼룩진 세월의 앙금을
깊은 골의 눈물로
말끔히 씻어 낸 뒤
냉철한 이성의 필터로
경계를 정한다

재지 않은 손놀림에
시간은 적당한 탄력성을 얻어
감정들이 조화롭게 섞여 흐르고
어느새 순결하게 걸러진
삶의 체취가
오랜 지기처럼 온 몸에 배인다

-자작시-

가을은 차 한잔의 향기가 유난히 그리운 계절이다. 낯선 거리를 지나다 커피 향이 코끝에 스치면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어진다. 낙엽에서도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난다던 가을이 아니던가!

나와 16년 동거 중인 시어머니의 취향은 아주 다르다. 시어머니는 채식을 좋아하시고 생선이나 회는 입에도 안 대시는 반면, 난 치즈를 무척 좋아하며 생선과 회는 뭐든 잘 먹는다. 과일에 대한 취향도 달라서 시어머니는 배를 좋아하시지만 난 홍옥을 껍질째 아삭아삭 씹어 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고부간에 딱 한 가지 일치하는 취향이 있다면 식후에 커피나 다른 차를 꼭 챙겨 마신다는 사실일 것이다. 어머니는 커피, 설탕, 크림이 다 들어간 것을, 난 인스턴트 커피라도 커피만 한 스푼 넣고 마시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결혼 전 내가 여러 종류의 차를 사다 놓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줄 알던 지인이나 내게 아이들을 맡겼던 부모들은 외국 여행을 다녀오거나 추석 등 명절이 되면 꼭 차나 '까망베르'를 비롯한 치즈를 선물하곤 했다.

그 사치한 습관이 남아 치즈라면 다 좋아하고 지금도 어디선가 색다른 커피향이 나면 저절로 고개가 돌아가곤 한다.

그러니 결혼 후에도 난 여전히 원두를 가는 기계(밀)와 최소한 서너 가지 이상의 원두를 장만하여 원두를 적당히 배합하여 즉석에서 갈아 커피 향을 즐기며 원두를 내려 마시곤 했다.

그러나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전에는 단 한번도 입에 안 대던 자판기 커피도 마신다. 집에 있는 원두마저 내려 마시기는커녕 인스턴트로 대신하고, 나를 위해 원두를 산다거나 여유롭게 커피를 내려 마신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차에 대한 감정의 사치가 남아있던 것에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생겨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했던 러시아와 중국에서조차 차(茶)에 대한 사치만은 예외로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교수님께 듣는 순간 현실에 걸맞지 않게 버리지 못했던 감정의 사치에 대한 죄책감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하기야 15평짜리 아파트에서 5천만원이나 하는 스피커를 들여놓은 음악 마니아를 만난 적이 있다. 그가 살던 집이 그 당시 5700만원쯤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며, 그 돈을 보태 넓은 곳으로 이사하라고 충고한다고 했지만 자신에겐 큰 집보다 좋은 기계로 듣는 음악이 주는 효용가치가 훨씬 더 크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 나와 남이 다른 이유가 바로 감성의 차이와 정신 때문이 아닐까?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쓴 '생존자'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식사와 함께 제공되는 차를 한 모금만 마시고 남겨 세수를 하고, 언제나 단정히 머리를 빗던 사람들만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결국 동물의 본능을 넘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자들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동물이 목마름이나 배고픔을 정신과 감정의 사치와 맞바꾸는 일은 없을 테니….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아름답고
사랑처럼 달콤하다

-커피예찬/탈레랑

C'est un démon plus noir, plus comme l'enfer qu'il fait chaud,
comme l'ange étant pur et comme l'amour il est doux.

-Admiration du café /Talleyland

It's blacker demon, like the hell it's hot,
like the angel being pure and like love it's sweet

-Admiration of coffee /Talleyland

커피가 도래하도다. 그 근엄하고 유익한 물약이,
위를 낫게 하고, 천재를 한결 명민케 하며,
기억을 되살리고, 슬픔을 위로하며,
원기를 불러일으키면서도, 미치게 만들지는 않음이여

-작자 미상(1674년)

난 여전히 가난한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살고 있지만 인간이 지닌 감정의 사치마저 언제나 생존과 맞바꾸는 일은 하지 않으련다.

그래서 이 가을만큼은 때론 시집 한 권, 영화 한 편, 악마처럼 검고 뜨거우며 사랑처럼 달콤한 차 한 잔이 주는 풍요로움과 한 끼의 식사를 맞바꾸는 나의 작은 감정의 사치를 언제까지나 지속시키려 한다.

2006-10-0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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