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땅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 후마니타스 소금꽃 나무
이 땅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기
김진숙의 <소금꽃나무>
이명옥 (mmsarah)
그대, 땀에 절고 절어 등짝에 허옇게 말라붙은 소금꽃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부끄럽지만 난 솔직히 소금꽃나무를 본 적이 없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산업 역군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하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개밥 같은 도시락을 먹을 때 나는 유한마담처럼 프랑스 문화원이나 들락거리며 유럽 영화나 보던 한심한 삶을 살았으니 말이다.
한진중공업 다닐 때 아침 조회 시간에 나래비를 쭉 서 있으면 아저씨들 등짝에 하나같이 허연 소금꽃이 피어 있고 그렇게 서 있는 그들이 소금꽃나무 같곤 했습니다. 그게 참 서러웠습니다. 내 뒤에 서 있는 누군가는 내 등짝에 피어난 소금꽃을 또 그렇게 보고 있었겠지요. 소금꽃을 피워 내는 나무들. 황금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들. 그러나 그 나무들은 단 한 개의 황금도 차지할 수 없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아시겠지요?
작은책 3월 강좌 주인공은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김진숙씨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용접공, 민주노조 운동을 20년 이상 해 온 사람, 지금도 현장에서 목이 터져라 노동자의 인권과 희망을 이야기 하는 사람, 웬만해서는 일부러 강사 책을 구해 읽고 간 적이 없었지만 김진숙씨가 쓴 <소금꽃나무>는 꼭 읽고 가야 할 것 같은 부채감에 <소금꽃나무>를 샀다.
그이 글은 단 한 페이지 넘기기도 몹시 힘이 들었다. 전철 안에서 책을 펼쳐 읽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억지로 눈물을 집어삼키느라 목울대가 뻣뻣해 지면 얼른 책을 덮고, 또 다시 책장을 펼쳐 읽다 덮고 하느라 두껍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은 책을 강의를 들으러 갈 때까지 절반도 못 읽고 말았다. 어렵게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순간순간 커다란 바위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은 아픔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그이도 자신이 노동자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저 운명이려니 체념하며 자신을 벌레처럼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시집을 끼고 다니고 니체를 탐독하며 자신은 여느 노동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던 김씨는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이라는 전태일 열사 평전을 읽고 인생의 방향을 180도 전환, 지금까지 투쟁의 현장에 서 있다. 다른 이들은 다 복직했지만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만이 살길’이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외치는 그이는 자각의 순간을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내 존재 자체가 벌레처럼 징그럽고 싫었다. 벌레가 뭘 할 수 있으며 벌레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그러나 전태일은 너는 벌레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고 인간이 당연히 품어야 하는 희망에 대해서 절규를 하고 있었다. 희망. 세상을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을 품은 인간이라는 존재.
지금보다 나은 삶이 있다는 진실이 기뻤고, 그 진실은 뭐든 할 수 있다는 용기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24년 뿌리 깊은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는 일부터 시작했고 그 일로 대공분실 세 번, 부서 이동 두 번, 해고, 출근 투쟁, 무자비하고 끝이 없던 폭행, 수배 5년, 두 번의 감옥...... 지금까지 나를 버텨 왔던 건 그때의 자책과 용기가 아니었나 싶다.
학교에서 내 주는 가정환경조사서에 아버지 직업을 ‘농업’이라고 떳떳하게 쓰지 못하고 ‘상업’ 이라고 써 내고는 온종일 가슴이 오그라들어 있었다는 그이가 이제는 아버지 직업란에 노동자‘라고 써 내는 당당함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이의 한마디 한마디는 진정한 노동자 의식을 지니지 못했던 내 가슴에 날카로운 각성의 칼날이 되어 가슴을 후벼 판다. 그이가 만난 사람들과 그이가 쏟아놓는 삶의 편린들은 산업화라는 명목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한 시대를 고스란히 드러내 주고 있어 허위의식으로 가득 찼던 내 자신의 지난 삶을 몹시 부끄럽게 만들었다.
한없이 비대해진 자본의 논리에 끊임없이 노동과 시간을 착취당하는 힘없는 노동자들, 황금만능시대, 자본이 곧 권력인 시대에 이 땅에서 노동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저번에 조선노협에서 상경 투쟁헐 때 작업복 걸친 채로 서울 한복판 휩쓸고 댕깅께 갱찰덜이 ‘그거 뭐헐 때 입는 옷이요?’혀서 ‘우리 작업복인디요?’ 형께 ‘참말로 고거이 사람이 입는 옷이다요?’ 그랬다 안허요. 우리가 그 옷을 입고 그냥 헨장에 서 있기만 허간디? 땡끄 안이고 보로꼬 바닥이고 왼통 바람난 과부 좆몽댕이 찾아 댕기드끼 헤집고 댕기는 걸
(중략)
노동자먼 노동자답게 지가 노동자란 걸 인정허고 떳떳허게 가슴 펴고 살아야 발전이 있는 거이제.
나는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사실이 부끄럽지는 않지만 윗글의 주인공처럼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살지는 못한다. 더구나 황금을 무기 삼아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앞에 주눅이 들어 감히 노동자의 ‘희망’을 입에 올리지도 못한다. 그러나 이제는 내 자신의 삶을 억지로 미화하며 스스로를 속이며 살고 싶지는 않다.
“이랜드 투쟁이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싸우기 때문이다. 정규직 노조가 나서지 않으면 비정규직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정규직들이 함께 싸우면 무조건 이긴다. 비정규직은 곧 정규직의 미래의 모습에 다름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이 어조에는 진실을 직시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실려 있었다.
왜 우리는 연대 해보지 도 않고 미리 패배를 말하는 것일까? 왜 정규직은 자신들의 미래가 비정규직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진실을 외면하고 사는 것일까?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눈속임과 조삼모사의 사탕발림에 양심과 영혼을 손쉽게 팔아 넘기는 사람들. 그 사람들 사이에 혹시 내 자신도 속해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일이다.
어느 노조위원장의 일곱 살난 아들아이가 했다는 말처럼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이 될 그날은 결단코 거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다 바쳐 이 땅의 노동자들 가슴에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다니는 김진숙씨만이 아니라, 노동 현장에서 땀 흘리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자각하고 연대해야만 소금꽃나무 대신 ‘희망’ 씨앗이 싹을 틔우고 마침내 커다란 나무로 자랄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것이 아닐지.
덧붙이는 글 | 소금꽃나무/김진숙/후마니타스/10,000원
2008.03.29 13:02 ⓒ 2008 OhmyNews |
|
이 땅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기
복사꽃 핀 외딴 집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