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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의 십자로> 1934년 무성영화 필름을 복원한 것이다.
변사 나오는 무성영화 보신 적 있나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필름 <청춘의 십자로>
이명옥 (mmsarah)
<청춘의 십자로>는 대한민국이 소장한 가장 오래된 필름이다. 질산염 필름이라 기술상의 문제로 일본에서 복원하여 가져 온 것이라고 한다. 1934년 작품이니 그 시대성만으로도 영화마니아들이라면 한번쯤 보고 싶은 영화일 것이다.
지난 19일 한국영상자료원(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이 매력적인 무성영화를 특별 상영했다. 조선희 영상자료원 원장은 오랜 필름을 김태영 감독의 손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무성영화라 입모습만으로 대사를 만들고 변사, 현악 사중주의 연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남녀 주인공의 등장시켜 크로스 아트의 면모를 갖춘다.
먼저 '삐끼' 비슷한 피에로가 주인공의 모습이 담긴 포스터를 오려 붙인 북을 둥둥 치며 극장 안을 돈다. 이전에는 아마도 북을 치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려고 죽 늘어 선 관객들이 입장하기 전에 손바닥에 큼지막한 알사탕 한 알씩을 떨어트려 준다.
그 알사탕이 남느냐 모자라느냐는 그날의 날씨와 변사의 기분에 달렸다나 뭐라나. 어쨌거나 빨갛고 노랗게 줄무늬가 들어간 '눈깔사탕'(우리는 그 사탕을 그렇게 불렀었다)을 얻느라 억지 미소까지 지어가며 애교를 부리는 관객들은 이미 시간의 저 편으로 마음을 옮기고 있었다. 관객이 자리를 잡고 앉자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화면 속에서 방금 뛰어 나온 것 같이 화면 속과 똑같아 보이는 여배우가 애살스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당신만 믿고 순정을 바쳐 사랑을 했건만 얄궂은 내님 한숨만 쉬며 아무 말 못 하네.
그 누가 사랑 달콤한 거라 말을 했었던가. 한번 준 순정 받을 길 없나 무정한 사람아.
돈이 뭐 길래 이 몸을 팔아 떠나야 하는가. 내 얼굴 보고 떠나지 마라 제발 말 좀 하오.
그 누가 인생 살만한 거라 감히 말했던가. 찢겨진 사랑 되돌려주오 야속한 세상아.
다른 남자 품을 당신이라 생각한대도 이제 추억으로 살아가긴 너무 길잖아.
아 모르겠다. 그냥 도망갈까 고동소리 따라서 갈매기는 넌 왜 또 슬피 우느냐
청춘의 십자로 엇갈린 운명아 짓밟힌 순정, 이제는 어디로.
화면은 세월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1930년대 경성 역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잠시 무성영화의 장면이 흐르다가 어느 새 화면 속 인물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와 애잔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또 다시 화면이 이어지고 변사는 화면속의 인물이 되어 성별, 나이, 너와 나 사이를 넘나들며 관객들의 정서 속으로 파고들어 웃음과 울음을 유도하고 있다. 플롯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지만 화면 구성은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간다.
시대의 최첨단 유행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1930년대 대한민국 대부분이 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양복에 중절모를 쓰고 골프를 치고 커피에 양주를 마시는 모습은 현대부자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일단 '순진하며 미모를 지닌 가난한 여성이 부잣집 바람둥이에게 농락을 당하고 버림받아 복수를 꿈꾸다 좌절하여 죽었다'는 식의 결말이 아니어서 좋다. 농락을 당했지만 그들은 과거를 현재에 결부시켜 비극을 이어가지 않고 과거와 다른 현재의 새 삶을 택해 즐겁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찰리 채플린이 나오는 무성영화와는 또 다른 맛, 한없이 빠르고 스케일 큰 할리우드식 오락영화와도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하며 마음껏 웃을 수 있었던 영화 <청춘의 십자로>.
오랜만에 화면을 따라잡느라 바쁜 눈길 없이도, 마음속으로 느림과 여운을 꼭꼭 씹어 삼키지 않고도 만족스럽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대사가 많은 영화보다, 스카렛 오하라가 타라 농장을 등지고 서 있던 해질녘의 장면이 담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같은 영화가 좋다. 프랑스 영화 <고양이(Le chat)>에서 공원 벤치에 마주 앉아 침묵으로 상대의 눈길을 살피던 장가뱅과 시몬느 시뇨레의 연기는 여운이 남아 혼자 오래 곱씹을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꽤나 오랫동안 할리우드식 오락영화나 갱영화를 보면 왠지 손해나는 기분이 들어 혼자 억울해하곤 했었다. 그러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여성신문사를 다닐 무렵인 2002년 겨울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영화 관람을 즐기는 직원들끼리 모여 영화를 보자는 의견이 나왔고 나도 그들 중 한명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선택하는 영화는 하나같이 한번 하하 웃고 여운이 남지 않는 영화였다.
나이가 들었음이었을까? 그동안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장르의 영화가 주는 쾌감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냥 아무생각 없이 웃다가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깨끗하게 감정을 티끌마저 털어버리고 나올 때의 가벼움을 나도 조금은 느꼈나 보다.
그래서 내 스스로 오락물을 선택하거나, 자주는 아니지만 이전처럼 생리적 두드러기를 일으키며 오락물을 피하는 일은 없어졌고 이따금 그저 웃으며 머릿속을 확 비우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그럼에도 오락영화를 볼 때면 늘 2% 부족한 그 무엇이 내게 아쉬움을 남겨주곤 했었다.
<청춘의 십자로>에 대한 개인적인 평을 한다면 오랜만에 내가 이전에 즐기던 프랑스 흑백 영화나 찰리 채플린이 나오던 무성영화와 할리우드식 영화가 지닌 오락성과 가벼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해 준 유쾌한 영화였다고 말하겠다. 변사의 대사에 따라 기울던 몸짓을 훔쳐보던 재미의 쏠쏠함, 남자 주인공의 여동생 역을 맡은 여배우 신일선의 미소에 여성인 내 가슴에조차 꽃송이가 하나 가득 피어나는 기분이 들었으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상영 문의 : 한국영상자료원 02-3153-2001
2008.07.30 21:29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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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 핀 외딴 집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