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일반
ADMIN 2018. 12. 17.
 유교와 사회주의 논쟁/박노자,허동현 교수
글쓴이: 이정호  날짜: 2003.04.22. 09:20:11   조회: 2085   글쓴이IP: 211.178.104.162
유교와 사회주의
박노자, 허동현의 서신 논쟁-
2003-04-21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 퍼온 글


"유교의 황혼은 곧 극동 사회주의의 여명으로 이어진 셈"/박노자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시지요?
보통 유교를 생각할 때 전근대적인 것으로―그리고 어떤 이들은 고리타분한 옛날 것으로 ―치부하기 십상입니다. 근대의 문맥에서의 유교를 이야기하자면 대개 개발 독재가 이용했던 일제 시대 식의 충효 사상 정도로만 생각하지요. 그러나, 전근대적 유교와 근대를 무조건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나누는 통념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사실, 마지막 세대의 석유(碩儒)들의 언행을 보면 눈에 띄는 사실 중의 하나는, 그들 중의 상당수는 근대 자체를 송투리째 부정한 것이 아니고 근대라는 현실 속에서 예의염치의 이상에 부합되는 버전을 열심히도 찾으려고 하신 겁니다. 세계보편적인 가톨릭 신앙을 바로 그러한 버전으로 생각했던 분들도 계셨지만, 사회주의를 바로 삼강오륜을 실천할 수 있는 근대로 주목하여 사회주의와 유교 이상의 접목에 노력하신 사상가들도 꽤 있었지요. 물론 그들 모두를 딱 잘라 사회주의자라고 부르기에는, 그들의 사상 체계가 훨씬 복잡했습니다. 궁극적인 이상으로서는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가 제시됐으면서도, 약육강식 위주의 국제 현실 속에서 일단 부국강병부터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도 꽤 많았습니다. 그러나 도덕적 당위로서의 사회주의가 상당수의 유교 학자들의 마음을 잡았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심장합니다.
한국 지성계에 큰 영향을 미친 중국의 개신(改新) 유림 양계초(梁啓超: 1873-1929) 같으면, 한 사람의 성공이 만 명의 패배자의 해골을 토대로 하는, 자본가의 폭압이 금수(禽獸)를 능가하는 서구와 미국의 사회가 사회주의적 개혁이나 혁명을 통해서만 개선될 수 있으리라 내다봤습니다 (『新民叢報,』제14호, 제2면). 그에 의하면, 유럽과 미국의 경제 사회가 이미 [사회주의적] 혁명을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전락 (『新民叢報』, 제16호)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양 언어를 제대로 해득하지 못하는 유림 양계초이었지만, 그는 미국과 서구 자본주의가 독점자본(trust) 중심으로 재편돼 가는 현실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자본의 80%가 이미 독점자본가에 의해서 집중된 미국의 사정을 1903년에 직접 목격한 양계초는, 점차 세계 전체가 몇 안되는 독점 재벌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확실하게 예견했습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그 당시의 독일 사민당의 주된 이념가인 카우츠키(K.Kautsky: 1854-1938)처럼 양계초도 서구의 국제적 무산 계급이 그 몇 개의 독점 재벌을 사회화시킴으로써 사회주의로의 이동을 비교적으로 쉽게 이루어낼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중국처럼 후진적이며 자본주의가 아직 발전돼야 할 사회에서는, 일부의 사회주의적 개혁(부유세, 증여세 신설, 노동자 보호법 등)을 단행하되 전체적으로 기업가 위주의 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의 현실론이었습니다. 평등한 토지 소유를 보장했던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정전제(井田制)가 바로 오늘날 사회주의의 원류라고 자부하고 스승 강유위의 대동 사상을 유럽의 사회주의와 매우 흡사하다고 평했던 양계초는, 왜 중국에서의 사회주의로의 이동의 현실적 가능성을 부정했을까요?

1903년의 도미 여행 때 미국과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해외 침략의 위험을, 그리고 그 침략을 제대로 막지 못하는 중국의 약함을 뼈저리게 느꼈던 양계초는, 중국에서 개명전제(開明專制: 즉, 개발 독재)에 의해서 중국 토착의 독점 재벌들이 생기지 않는 한 중국이 곧 미국 독점 자본의 “먹이”가 되리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新大陸游記」, 1904).

그 당시에 사회진화론을 신봉해 국제 사회의 약자가 도태를 면하기 위해서 꼭 강자가 돼야 된다고 믿었던 양계초는 “현실적인 방략”으로서 “개명전제”와 “부국강병”을 내걸었지만, 서구의 역사 발전의 이상적인 목표로 늘 사회주의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약육강식의 논리를 “어찌 피할 수 없는 과학적 진리”로 받아들인 그에게는, 그래도 궁극적인 차원에서 비폭력적 사회를 갈망하는 유교적 양심이 늘 남아 있었던 겁니다.

1920년초, 1919년 내내 제1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돼버린 유럽의 곳곳을 돌아본 양계초는 그의 유명한 기행록 「구유심영록절록(歐遊心影錄節錄)」에서 본인의 과거의 사회진화론적인 한계를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한 때 “약육강식”을 부르짖어 부국강병의 이상을 많은 한국 개신 유림에게 심어준 바 있었던 양계초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피해의 규모를 자기 눈으로 확인한 뒤에 바로 침략의 다윈적 긍정과 과학 문명, 그리고 자본주의의 만능에 대한 맹목적 신봉이 유럽의 파산을 가져다주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전쟁 때 군국주의의 광풍에 휩싸였지만 전후의 침체로 새로운 고통을 느끼게 돼서 반(反)자본 투쟁의 대열에 합류하는 전승국 노동자, 그리고 영국, 프랑스 등지의 사민당들의 급속한 당세 확장을 목격한 양계초는, 유럽의 정치적 희망이 바로 개혁적인 사회주의에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개혁이 실패될 경우, 이미 “노동의 국가와 자본의 국가로 나누어진” 유럽 각국에서 사회 혁명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양계초의 예측이었습니다. 사회주의적 균무빈· 화무과(均無貧·和無寡) 이상이 내재돼 있는 유교가 전통 사상의 주류를 이루었던 중국의 경우에도 궁극적인 희망은 사회주의에 있었지만, 현재의 후진국 중국에서 분배가 아닌 생산의 증진이 급선무라는 것은 여전히 양계초의 확고한 주장이었습니다 (제11장, “社會主義 商權”). 말하자면 그의 뜨거운 가슴은 평등과 평화의 사회인 사회주의를 열망하고 있었지만, 그의 차가운 머리가 “중국으로서 아직 빛의 세계로 진입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타이르고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100년 전에 양계초가 제기한 문제들은, 지금도 중국 지식인의 화두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상의 “개명 전제(개발독재)”를 실시하고 부국강병 프로젝트의 신속한 실행을 위해서 노동자와 농민에게 끝없는 고통을 주는 오늘의 중국 공산당 정부를 상대로 인권과 민중 복지의 기치를 내걸고 싸워야 하는지, 아니면 정부의 “애국주의적” 명분을 그대로 믿어 참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중국 젊은이들이 고심하고 있습니다. 현실주의적 자강을 도모하는 공산당 정권을 상대로 궁극적인 이상인 인권 복지 사회를 위한 투쟁을 벌인다면 어쩌면 알게 모르게 중국의 분열을 획책하는 미제의 방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정권과의 타협은 애민(愛民)과 정의의 이념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제국주의에 의해서 왜곡될 대로 왜곡된―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계속 반인륜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이 세계에서는, 주변부 지식인으로서 현실과 이상의 딜레마만큼 어려운 문제가 없을 겁니다. 현실에서는 한 나라의 차원에서 부국강병이 불가피할 수도 있지만, 한 개인으로서의 지식인의 양심은 늘 다른 가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근대”의 폭력의 도가니 속에서, 양계초처럼 적어도 세계 발전의 궁극적인 목표로서 국제주의적, 비폭력적 사회주의를 제시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유교적 토양이 두꺼웠던 선비인 만큼 가능했던 일입니다.

양계초의 스승이며 양계초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유교적 입장에 선 중국의 마지막 대유(大儒) 강유위(康有爲: 1858-1927)는, 그의 명작 『대동서(大同書)』(1935년 출판)에서 어느 서양 철학가보다도 훨씬 더 철저한 공산주의적 사회를 그렸습니다. 계급, 인종, 국경, 재산의 사유의 폐지에다 결혼 제도마저도 폐지돼 배우자의 자유 선택을 언제나 할 수 있는 사회,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회는, 그가 꿈을 꾸었던 대동의 사회이었습니다. 허동현 교수님께서 유림들이 남성의 헤게모니를 올바른 세계 질서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였다고 지적하셨는데, 서구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유교의 인(仁)의 이상을 접목시킨 강유위 같은 이는 여성 차별 폐지의 이상을 과감하게 내세웠습니다. 그것이 유교의 생명력, 유교의 진보화(化)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는가요?
물론, 양계초는 중국이 아닌 서구에서의 사회주의적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며, 강유위의 『대동서』는 행동 강령이 아닌 미래 이상의 서술이었습니다. 즉, 그들의 사회주의적 태도는 현실성이 결여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유림의 저서를 젊었을 때 탐독한 모택동이 결국 중국 사회주의의 지도자로 성장한 것이 과연 우연인가요? 집권한 뒤에 가혹한 숙청과 넌센스적인 공자 비판 캠페인으로 그 이름이 더럽혀진 모택동이지만, 그의 초발심이 이상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저는 의심이 없습니다. 예컨대 그의 초기 논문인 「호남농민운동의 고찰보고(湖南農民運動考察報告)」(1927년3월)를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지주들의 폭력에 저항하는 농민 협회(農會)들이 악질 지주들에게 공개적으로 수모를 주고 그 발언권을 완전히 빼앗는 등 너무나 지나쳤다는 일각의 비판에 대해서 젊은 혁명가 모택동이 다음과 같이 반박했습니다. “이것은 다 토호와 악질적 지주들의 폭력의 결과일 뿐이다. 그들이 그들의 힘만 믿어 지역적 두목(?)의 위치를 차지한 지 오래다. 그들이 농민을 유린했기에 농민들이 이처럼 심하게 반항하는 것이다. 농민의 반항과 폭력적 저항이 가장 큰 지방은, 바로 토호와 악질 지주들의 폭력이 원래부터 가장 심했던 지방들이다(…)(所謂過分的問題).”
아래에서부터의 방어적인 폭력의 이유를 윗사람의 패도(覇道)에서 찾는 것은, 농민 봉기의 동기에 대해서 고심하는 양심적인 유교적 지식인의 전통적 태도입니다. 유식층―즉, 잠재적으로 통치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층―에 속하는 그들은, 결국 피치자들의 폭력적 저항을 부른 자신들의 계층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서 늘 뼈아픈 반성을 하곤 했습니다. 아버지의 쌀 장사로 여유가 생긴 가정에서 태어난 덕에 어릴 때 사서삼경을 외운 뒤에 고등소학에서 강유위와 양계초를 읽을 수 있었으며, 나중에 사범학교까지 나올 수 있었던 지식인 모택동에게는, 이와 같은 유교적인 부채 의식이 사회주의자로서의 자기 발전의 기원이 된 듯합니다.
강유위와 양계초의 유교적인 이상주의는 모택동과 같은 중국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서 정의 사회 구현의 불을 지핀 셈이었습니다. 적어도 지식인 일각의 심성의 차원에서, 유교의 황혼은 곧 극동 사회주의의 여명으로 이어진 셈이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이 결국 살인적인 국제 질서에의 시니컬한 적응을 의미했지만, 사회주의는 모호하게나마 그 질서의 근본적인 변혁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사회주의가 권자의 이데올로기가 돼서 왜곡돼버린 현재의 중국에서도, 유교의 이상주의의 심성은 방려지(方勵之: Fang Lizhi, 1936년생)와 같은 민주 인권 투사들에게 영감을 그대로 주는 것 같습니다. 방려지 선생이 언로 개방이나 지도자의 도덕, 인권을 지키는 법치를 이야기할 때, 꼭 명나라 시대의 황종희(黃宗羲: 1610-1695)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유교의 몸체는 이미 죽었다 해도, 유교의 영혼이 살아 있는 것이지요·
저 같으면, 극동 사회주의의 근저에 흐르고 있는 유교적 심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가 바로 현대 중국의 학계의 거두 곽말약(郭沫若: 1892-1978)의 『마르크스의 공자 방문기』(1925년)라는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자와 마르크스의 가상의 대화를 중심으로 하는 이 텍스트에서, 공자가 그의 인정(仁政), 균분(均分: 균등한 분배), 대동(大同) 이념들이 다 마르크스의 공산(共産)관념과 대동소이한다고 웅변하고, 마르크스가 원시 유교를 비(非)과학적인 공산주의로 인정해주는 겁니다. 허동현 교수님께서도 기억하시겠지만, 이 작품이 유교가 반동 사상의 중심으로 지목돼 타파 운동의 타깃이 된 1920년대 중반에 쓰여진 것이지요. 그러나, 왕권의 시녀가 된 말류적인 유교가 진보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음에도, 원시 유교의 고귀한 인본주의를 사회주의의 전신(前身)으로 인정해주는 신(新)사상가들이 언제나 있었던 셈이지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요점만 거듭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유교적 유산의 일부분을 계승했다고 해서, 그리고 초기에 이상주의적 정신이 충만했다고 해서 오늘의 중국이나 북한의 집권 공산당들의 독재나 반(反)민중적 행각은 절대로 합리화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중국과 북한의 집권당들이 오늘과 같이 변질, 왜곡됐는가 라는 복잡한 주제를 여기에서 논외로 하고, 그들이 지금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와 전혀 무관하다는 점만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오히려, 당국의 박해를 받으면서 독립적 노조를 조직하고 파업을 이끄는 현재 중국의 지하 노동 운동가들이야말로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이상주의적 정신의 적통(嫡通)을 이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저녁 안개가 짙어지는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아시아에서 유교의 황혼은 일본식 근대국가로 귀결된 것 아닐까요?"/허동현

안녕하세요 박노자 교수님

박노자 교수님께서는 유교와 사회주의의 이상을 약육강식의 신자유주의 시대를 뚫고 나갈 변화와 진보의 철학으로 보시는군요. 저 역시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예의염치를 알며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이상적인 사회―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를 이상으로 동경합니다. 또한 유교와 사회주의의 이상이, 물신(物神)의 유혹에 둘러싸인 우리의 정신을 지켜주는 소금의 역할을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유교의 황혼이 극동 사회주의의 여명으로 이어졌다는 박교수님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유교의 황혼기에 한국의 지식인들이 참담한 현실을 타개할 동아줄로 우선 받아들인 것은 기독교였기 때문입니다. 개항 이후 대다수의 개화파 인사들은 기독교를 유교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교가 지닌 단점을 보완해 국가의 부강을 이끌어 내는 종교로 인식하였습니다. 박영효(朴泳孝, 1861~1939)는 “나는 미국에 가서 여러 곳을 유람하며 마음을 두고 세밀히 관찰하였다. 과연 그 풍속이 문명하고 순량(純良)함은 오로지 야소교(耶蘇敎)의 교화에 의함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 나라의 정치가 화평하고 민간사업의 번성함은 종교와 무관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근원을 소급하면 종교의 교화에 의하지 않음이 없다. … 동양제국은 야소교를 신봉치 하니하면 구미각국과 같이 존립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朝野新聞』 1886년 3월 31일자)”고 하였습니다. 특히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기독교를 유교를 대체할 새로운 정신적 지주로 보아 유교를 철저히 부정하고 기독교로 개종하였지요. “나는 과거에 유교의 사서(四書)를 정독하고 많은 교훈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그 교훈에 복종하여야만 될 까닭은 없었다. 영혼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나의 추구하는 바의 것을 거의 얻지 못했다. …나의 회개를 방해하는 장애물 그것은 박해와 조롱에 대한 공포, 옛 친구들을 잃는 손해, 종종 밀려드는 여러 의심과 유혹 등이었다. 나는 세례 받기를 원한다. …나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리스도는 구주(救主)이심을 믿는다(「A Synopsis of What I was and What I am<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와의 대조>」, 1887년 3월 23일).

1880년대에 시작된 양반 지식인들의 개종은 1890년대에 들어 더욱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추세는 1905년 보호국 전락과 1910년 국망 이후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3.1운동 이후 기독교가 현실 개혁 내지 타개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안 후에야 박헌영(朴憲永, 1900~1955)처럼 또 다른 동아줄인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합니다.
간어제초(間於齊楚). 전국시대 강국 제(齊)와 초(楚) 사이에 끼여 있던 소국 등(騰)의 문공(文公)이 약육강식의 현실 속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부심(腐心)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등나라와 처지가 비슷한 약소국으로 열강들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의 현실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봅니다.

“등문공: ‘등나라는 작은 나라인데,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니, 제나라를 섬겨야 합니까? 초나라를 섬겨야 합니까?’

맹자: ‘그런 계책은 내가 어떻다고 말할 것들이 아닙니다. 그래도 한마디 계책을 드린다면, 이 나라의 [성벽 밑에] 연못을 더욱 파고, 이 나라의 성벽을 더욱 쌓아서 백성들과 함께 나라를 지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백성들이 버리지 않는다면 한 번쯤 해 봄직한 일입니다’(『孟子集註』양혜왕 하 제13장).”

"등문공:‘ ‘제나라 사람들이 설 땅에 성곽을 쌓으려고 합니다. 나는 무척 겁이 나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맹자: ‘예전에 태왕이 빈에서 사실 때에 오랑캐들이 침노하거늘 그곳을 버리고 기산 아래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곳을 골라서 취한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그랬던 것입니다. 진실로 착한 일을 하면 후세의 자손이 반드시 왕노릇 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군자가 나라를 세워 국통을 전하는 것은 그것을 계승하여 나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 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임금님께서 저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힘써 착한 일을 행하셔야 할 뿐입니다’(『孟子集註』양혜왕 하 제14장).”

등나라의 문공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당시 그가 택할 수 있던 부국강병과 왕도정치 중 맹자(孟子)의 조언을 좇아 왕도정치를 철저하게 실행했지만 결국 망국의 길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유학자들이 수천 년 동안 꿈꾸었던 요순(堯舜)시대가 현실에서 한 번도 이루어지지 못한 도덕적 당위였듯, 계급과 착취가 없는 평등사회를 외친 사회주의 역시 아직은 이상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제나라와 초나라나 현재의 미국같은 패권국가들이 왕도정치나 사회주의가 구현되는 이상사회를 추구한 적도 하려 할 리도 없으니 말입니다. 등나라나 한국같은 약소국이 이상사회의 구현을 추구하기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이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옛이야기에 호랑이에 쫓겨 나무 위로 올라간 오누이가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약육강식(弱肉强食)과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이 관철되던 제국주의 시대 역사를 생각해봅니다. 강자이자 적자인 서구나 일본을 호랑이에, 중국과 조선의 유교적 지식인을 오누이에, 하늘을 예의염치와 평등이 구현된 이상향에, 그리고 동아줄을 유교나 사회주의에 빗대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늘은 왜 오누이에게 호랑이를 물리칠 총을 주지 않고 동아줄을 내려주었을까요? 동아줄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것은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몸은 죽고 영혼만 남은 유교와 사회주의가, 신자유주의라는 호랑이에게서 우리를 지켜줄 총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현실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구원의 동아줄에 불과할까요?
중국이 아닌 서구의 사회주의 혁명을 말한 양계초와, 행동강령이 아닌 미래의 이상을 꿈꾸었던 강유위는 호랑이를 잡는 총이 아니라 동아줄을 택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중국과 조선의 개신 유학자들은 몽상가일 뿐이겠지요. 몽상가라면 너무 심한 얘기고, 제가 볼 때 이들은 현실에서 구할 수 없는 총 대신 자신들 스스로가 호랑이가 되는 방법을 모색한 보수적 개혁가라고 생각합니다. 박노자 교수님께서도 강유위와 양계초가 그들이 꿈꾼 혁신적인 이상들이 중국이 아닌 서구에서나 실현 가능하다고 보아 이를 유보한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셨지요. 저는 이러한 유보의 논리가 “아시아적 가치”를 주장하며 인권과 민주주의를 유보하고 산업화를 앞세우는 개발독재 옹호 논리의 원형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발독재를 옹호하는 사랃들이 주장하는 아시아적 가치란 기실 유교적 가치가 아니라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을 모토로 민주주의를 유보한 일본 군국주의의 가치체계라는 반박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사람이란 자신의 견문을 넘어서는 생각을 하기 힘든 법. 강유위나 양계초의 개혁사상도 메이지 일본에서 머물며 체득한 것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일례로 양계초의 경우를 살펴보시지요. 양계초는 1898년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한 때 도미(渡美)하였으며 1903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신민총보(新民叢報)』라는 잡지를 간행하였습니다. 이 때 그는 이 잡지를 통해 「신민설(新民說)」을 연재해 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정신과 도덕의 혁명”을 주장하는 전통적 유교가치를 사실상 부정하는 신민사상을 주창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그는 동아줄에 불과한 유교의 옛 이상보다는, 실현 가능한 차선책으로 일본과 같은 호랑이가 되려 했지요. 왜냐하면 이들이 일본에 체류할 당시 보수화된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논리이자, 인종적 불평등과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사회진화론이 팽배했으며, 이러한 현실은 그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지요.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국가주의를 정당화하는 일본의 집단주의적 사회진화론에 많은 영향을 받은 양계초나 강유위는, 자신의 동포들에게 호랑이로 거듭나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특히 양계초의 신민사상은 『신민총보』와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 조선 지식인에게 널리 읽혀졌고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안창호(安昌浩, 1878~1938)가 남긴 일화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삼남(三南) 지방 출신인 유지(有志)가 도산(島山)을 찾아와 나라 일을 하고 싶은데 무엇을 하면 좋겠는지 모르겠다고 할 때에 도산은 ‘크게 용빼는 일만이 나라 일이 아니오, 양계초가 만든 『음빙실문집』이란 책이 있으니 그것을 우선 몇권 사서 삼남에 있는 유명한 학자에게 주어서 읽게 하시오. 그것이 나라 일이오’하고 타일렀다는 것이다(주요한 편저,『신정판 안도산전서』, 삼중당, 1971, 87쪽).”

특히 안창호는 1907년에 자신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비밀결사의 이름을 신민회(新民會)로 지었고, 그 부속학교인 대성학교(大成學校)의 교과서로 『음빙실문집』이 채택한 것에서 양계초의 주장이 얼마나 조선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양계초와 강유위의 저작을 읽고 호랑이가 되고 싶은 욕망을 품은 조선사람들은, 군국주의와 싸울 수 있는 민족주의를 고취하기도 했습니다. 박은식(朴殷植, 1859~1925)도 모든 사람의 평등을 외친 러시아 혁명을 반겼다는 점에서, 유교와 사회주의를 접목해 좀더 도덕적인 근대를 도모했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혼을 강조하는 그의 민족주의사관과 일본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황국사관은 동전의 양면이었습니다. 그 역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현실세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지요.

또한 양계초 등의 저작을 매개로 조선에 수용된 사회진화론은 다른 한면으로는 일제 지배에 순응하는 논리로도 작용해 패배주의를 촉발하기도 했지요. 이 점은 안창호가 신민회 결성 당시 국민들에게 “독립은 타력으로 될 것이 아니라 민족 자체가 독립할 자격이 있은 후에라야 성취되는 것이요, 자기 힘으로 쟁취한 독립이라야 영구히 지닐 수 있는 것이다”라고 실력양성론을 설파했던 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교의 황혼이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여명으로 이어졌다는 선생님의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군요. 유교적 사회주의 이상을 추구한 양계초와 강유위가 택한 것이 정녕 동아줄이었다면, 이들의 이상이 청년 모택동의 정신적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모택동이 전개한 “문화대혁명”이란 “세기의 실험”은 거대한 역사적 과오로 판명났으며, 1990년 “천안문 사건”을 무력으로 진압한 현재 중국의 정권도 인민보다는 “당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적 색채가 짙다는 점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를 이루어 내기보다는 방려지의 투쟁이 상징하듯 “인민의 적”으로 역사에 쓰일 소지가 크다고 봅니다.
“미워하면서 닮아간다”는 말처럼, 인권과 민주주의를 유보하고 산업화를 앞세운 박정희 시대의 한국과 오늘의 중국이 군국주의 일본과 유사하다면, 그리고 한 세기 전 유교 지식인들이 꿈꾼 것이 ‘호랑이 되기’였다면, 동아시아에서 유교의 황혼은 일본식 근대국가로 귀결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강유위나 양계초와 같은 유교지식인이 꿈꾼 바는 유교의 이상주의나 사회주의적 근대가 아니라 권위주의적 개발독재의 자본주의적 근대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는지요?

봄비가 내리는 수원에서 허동현 드림

더 읽을 만한 책

1. 송영배. 『중국사회사상사』. 한길사. 1986.
2. 신용하. 『박은식의 사회사상연구』. 한국문화연구소, 1982.
3. 방기중. 『한국근현대사상사연구』. 역사비평사, 1992.
4. 김기승.「사회민주주의」. 『한국사시민강좌』25, 1999.
5. 이성규. 「중국 대동사상의 역사적 전개와 그 특징」. 『한국사시민강좌』10. 1992.
6. 유영익. 「개화파 인사들의 개신교 수용 양태」. 『한국근현대사론』. 일조각, 1992.
7. 이광린. 「개화파의 개신교관」. 『한국개화사상연구』. 일조각, 1979.
8. 이광린. 「구한말 진화론의 수용과 그 영향」. 『한국개화사상연구』. 일조각, 1979.
9. Levenson J.R..“"Confucian China and its Modern Fate". California, 1965.
10. Schwartz, B.I.. "Chinese Communism and the Rise of Mao". Harvard University Press, 1968.
11. James R. Pusey. “China and Charles Darwin”. Harvard University, 1983.
12. Edgar Snow. “Red Star Over China”. Grove Press, 1973.
13. 『梁啓超選集』. 上海인민출판사, 1984.
14. 모택동 등 중국 혁명가들의 디지털 저서 (번체 원본):
http://www.marxists.org/chinese/big5/index.html
15. 인터넷 孟子集註: http://www.dubest.net/

박노자/오슬로대 교수, 허동현/경희대 교수


LIST  MODIFY DELETE WRITE  





전체글 목록 2018. 12. 17.  전체글: 18  방문수: 62643
24 [동양철학산책] 인터넷 학습자료 1-20 종합 이정호2007.07.03.1512
20 "지식인은 이제 멸종 위기 처한 종족됐다"/퓨레디 이정호2005.06.08.545
19 영화 <모터 싸이클 다이어리>를 보고 /이병창 이정호2004.12.07.802
18 인물로 본 문화 - 트라시마코스 이정호2004.09.25.825
17 새내기 철학책 읽기 길라잡이/김치수 이정호2004.03.18.1197
16 유교와 사회주의 논쟁/박노자,허동현 교수 이정호2003.04.22.2085
15 베르그송의 철학/김진성 이정호2003.03.31.797
14 조그마한 내 꿈 하나/윤구병 이정호2003.01.12.617
13 인문학적 사유의 힘/홍성욱 이정호2003.01.12.456
12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촘스키의 견해 이정호2002.09.09.858
11 학생분들과의 대화 모음 이정호2002.08.21.1061
10 반야심경해설 이정호2002.06.12.1441
9 대학, 대학인의 이념 이정호2002.06.12.568
8 고전철학학교 [정암학당]안내 이정호2002.06.10.772
7 종교와 사회적 삶 이정호2002.06.10.754
5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이정호2002.06.10.1291
3 초기 그리스철학의 특징과 영향 이정호2002.06.10.1801
2 그리스철학 해외논문수집목록 이정호2002.06.10.651
RELOAD WRITE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