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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이데올로기는 종교적 근본주의/사미르 아민
글쓴이: 이정호  날짜: 2003.05.28. 09:10:38   조회: 940   글쓴이IP: 211.207.65.16
미국 이데올로기는 종교적 근본주의"

종속이론 거장 사미르 아민, "민주주의는 요식에 불과"
2003-05-28 @프레시안


이라크전쟁을 통해 드러난 미국의 제국주의적 실체, 미국 기득권층의 사상적 기원에 관한 논의가 뜨겁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미국인 평화운동가 더글러스 러미스는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이 미국내 주류 학계와 언론계에서조차 일종의 “붐”이라고 전했다. 미 프린스턴대의 정치철학자 쉘던 울린 교수는 최근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전의 나치 체제와 유사한 전체주의라며,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확산시켜 지배층의 무한 권력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전도된(inverted)’ 제국주의라고 규정했다.

이번에는 ‘이집트의 지성’ 사미르 아민(Samir Amin)이 미국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에 관해 분석을 내놨다.

A.G.프랑크와 더불어 신종속이론의 대가인 아민은 이집트의 영자 주간지 <알 아흐람 위클리> 15일자(현지시간)에 게재한 ‘미국 이데올로기(The American Ideology)’ 제하의 논평을 통해 종교적 선민(選民)의식에 사로잡힌 미국 지배계급의 청교도적 근본주의가 미국 이데올로기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9.11 테러 이후의 미국을 나치의 팽창과정과 빗댄 사미르 아민은 유럽식 근대화의 과정이 생략된 미국에는 ‘초강력 자유주의’에 대한 동의가 광범위하게 형성돼 노동자 정당이 없고,보수적인 두개의 자본가 정당은 “소수의 중간계급에게만 응답한다”고 분석했다. 울린 교수의 분석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아민이 유럽과 미국 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차이점으로 꼽은 것은 계몽주의의 영향이다. 그는 유럽의 근대문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계몽주의를 미국의 기득권들이 거부함으로써 전근대적이고 퇴행적인 사고체계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아민은 이같은 사상적 토대에 건설된 미국의 체제는 “오로지 경제에 복무하기 위해 존재하는 나라”이고 민주주의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미국의 국제 전략에 대해 아민은 “워싱턴의 명령에 저항할 능력이 있을 법한 다른 어떤 세력의 등장도 막는다는 것”이라며 미국 헤게모니는 특정한 경제 시스템이 아니라 ‘비대칭적 군사력’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와 철학을 넘나드는 아민의 분석은 미국의 본질을 파헤치려는 무성한 논의들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그의 분석을 들어보자.

다음은 사미르 아민의 논평 전문이다. ([ ]안은 번역상 추가된 글, 1) 2)...는 역주)



미국 이데올로기 / 알 아흐람 위클리, 15일

Ⅰ.

오늘날 미국은 일종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범(戰犯) 도당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사실 (의혹 투성이였던 2000년의)미국 대선은 그 쿠데타의 서막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히틀러도 [국민에 의해]선출된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유추에 의하면, 9.11은 게슈타포의 것과 유사한 경찰력을 히틀러 도당들에게 준 ‘의사당 방화사건’1)과 같은 기능을 가졌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나의 투쟁(Mein Kampf2))’과 대중조직, 전도사들이 있었는데 미국 국가안보전략(NSS)와 미국의 애국자 조직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제 이런 진실을 얘기하고, 지금까지 너무도 의미 없게 쓰였던 “우리의 우방 미국”같은 말들로 진실을 감추지 않도록 하는 용기를 갖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정치문화는 장구한 역사의 산물이다. 그만큼 각각의 나라마다 독특한 것이다. 미국의 정치문화와 유럽 대륙의 역사로부터 나온 정치문화는 너무도 다르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개신교 극단주의 분파에 의한 뉴잉글랜드3) 기득권세력의 형성,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 아프리카인들의 노예화, 그리고 19세기 내내 이어진 이민의 물결 결과, 민족별 공동체의 등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Ⅱ.

근대성과 세속주의, 민주주의는 종교적 믿음의 진화나 혁명의 산물이 아니다. 반대로 그런 새로운 힘의 요구에 맞게 조정돼야 하는 신념이다. 이런 조정은 청교도주의에만 유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 세계에서도 방법은 다르지만 똑같은 효과를 가졌다. 새로운 종교가 탄생해 모든 도그마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유럽 개신교 집단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막스 베버의 테제4)에도 불구, 종교개혁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전제조건이 되지 않았다.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갖게 된 중요성은 과장됐다. 종교개혁은 기독교사상에 대한 초기의 해석을 포함, 유럽의 이데올로기적 과거, 그리고 ‘봉건’체제와의 근본적인 단절을 뜻하지도 않았다. 종교개혁은 반대로 그같은 단절의 가장 혼란스럽고 원시적인 형태에 불과했다.

지배계급의 노력과 그들에 의해 지배되는 국민교회(영국 성공회나 독일 루터파 교회)의 창설이 종교개혁의 한 측면이었다. 그 교회들은 당시 부상하던 부르주아지와 군주ㆍ대지주 사이의 타협을 의미했다. 그들은 국민교회를 통해 빈민과 소작농들로부터 가해지던 위협을 포위할 수 있었다.

군주권력의 강화에 기여하는 국민교회를 설립함으로써, 또한 구체제와 떠오르는 부르주아지간의 갈등에 대한 국민교회의 중재력을 강화함으로써 보편성(universality)이라는 가톨릭적 이념은 사실상 주변화됐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후에 국제주의적 사회주의에 의해 진작된)의 출현은 지연됐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또다른 측면은 그것이 하층 계급들에 의해서도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태동으로 나타난 사회 변혁의 주된 희생자였다. 하층 계급들은 중세 천년간의 (변혁) 운동에서 나타났던 고전적 형태의 투쟁에 의지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시대를 선도하기는커녕 시대의 요구에 발맞추지 못하는 운명에 처했다. 피지배계급은 새로운 삶의 조건에 대한 요구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낼(articulate) 방법을 찾기 위해 프랑스혁명과 사회주의의 등장까지 기다려야 했다. 반대로 초기의 근대 개신교 집단들은 근본주의적 환상속에서 번성했고 이는 지금 미국 전역에 퍼져있는 것과 똑같은 일종의 묵시론적 비전에 사로잡혀 그같은 [개신교]분파들의 끝없는 재생산을 자극했다.

17세기에 영국을 떠나도록 강요당한 개신교 분파들은 가톨릭이나 정교(Orthodox)가 빠졌던 도그마와는 또 다른 독특한 형태의 기독교 사상을 발전시켰다. 사실 기독교사상이라는 그들의 브랜드는 영국 지배계급의 다수로 구성된 국교회 신도를 포함, 다수의 유럽 개신교도들과도 공유되지 않았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일반적으로 구약성서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과거 가톨릭과 정교는 기독교를 유대교와의 단절로 정의하면서 구약성서를 무시해왔다. 반면 개신교는 기독교를 유대교의 정통 적자의 위치로 복원시켰다.

뉴잉글랜드로 간 특수한 형태의 개신교는 오늘날까지 미국 이데올로기를 형성해오고 있다. 우선 미국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대륙 정복에 대한 정당성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아 이를 뒷받침했다.(성서에 입각해 약속의 땅을 폭력적으로 정복하려는 이스라엘의 정복사업은 북아메리카의 담론에서도 지속적으로 반복된 테마다) 다음으로 미국은 신이 부여한 임무를 전 지구적으로 확대했다. 이로써 북아메리카 사람들은 스스로를 “선민(選民)”으로 여기게 됐다.-실제로 이는 나치의 ‘선택받은 민족(Herrenvolk)’과 동의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협이다. 그리고 이는 미 제국주의(“제국”이 아니라)가 과거 제국주의에 비해 앞으로 더 무서워질 수 있는 이유다. 대부분의 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신의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결코 자칭하지 않았다.

Ⅲ.

나는 과거가 단지 되풀이될 뿐이라고 믿는 사람이 아니다. 역사는 사람들을 바꾼다. 유럽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불행히도 미국의 역사는 그 시작 당시의 공포를 없애기는커녕 그 공포의 위력을 강화시켜왔고 그 효과를 지속시켜왔다. 이는 미국 ‘혁명’과 지속적인 이민 물결을 통한 정착 과정에 모두 적용된다.

“미국 혁명”은 그 장점(virtues)을 추켜세우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회적 차원(의 변화)도 없는 제한된 독립전쟁에 불과했다. 영국 군주에 대항한 반란에서 미국 정착민들은 경제적,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추구한 적이 없다. 그들은 단지 기존의 [신대륙에 형성됐던 사회경제적]관계에서 나오는 이득을 모국[영국]의 지배집단과 더이상 공유하는 것을 거부했을 뿐이다. 더 많은 결정권을 갖고 있고 더 많은 이익을 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착민들은 변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똑같은 일들이 계속되게 하기 위해 [영국 지배집단의 영향력을 배제시킨]권력을 원했다. 그들의 1차 목적은 서구인들의 정착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는데 이는-다른 것도 있지만-아메리카 원주민들(Native Americans)에 대한 대량학살을 뜻했다. 혁명가들도 노예제도에 관해 결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혁명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기실 노예 소유주들이었고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편견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대량학살은 새로운 선민들이 신에 의해 부여받은 임무라는 논리속에 내재됐다. 그 대량학살을 낡고 오래된 과거 윤리의 책임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1960년대까지 대량학살 행위는 매우 공개적이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됐다. 할리우드 영화는 “착한” 카우보이와 “악한” 아메리카 원주민들간의 싸움을 붙였고, 이 과거를 졸렬하게 모방한 것이 수 세대동안 교육의 중심이었다.

노예제도도 마찬가지다. 독립후 거의 한세기가 지나서야 노예제도가 폐지됐다. 프랑스 혁명이 내걸었던 기치와는 정반대로, 노예제도의 폐지는 선악(善惡)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노예제도가 더 이상 자본주의적 확장에 기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폐지된 것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최소한의 민권을 인정받기 위해 그후로도 한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주의는 그때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1960년대까지 린치[사적 제재]는 공공연히 남아 있었고 가족들의 소풍에도 끼어들었다. 린치 관행은 수천명을 사형시키는 “재판(justice)” 시스템 속에 보다 개별적이고 간접적인 형태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사형 언도를 받은 사람들의 반 이상은 무죄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대부분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다.

끝없는 이민 물결 또한 미국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 이민자들은 자신들을 떠나게 한 [고국의]고통과 압제에 책임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희생자로 본토를 떠나왔다. 그러나 이민이란 것은 또한 고국의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집단적인 투쟁을 단념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이민국가[미국]의 개인주의 이데올로기와 “자수성가(pulling oneself up by one's boot straps)”로 맞바꿨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전환은 계급의식의 출현도 지연시켰다. 또한번의 새로운 이민 물결이 몰려와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거세시키고 나서야 계급의식은 성장했다. 물론 이민은 미국 사회의 “민족의식 강화”에도 기여했다. “개인적 성공”이라는 개념은 든든하고 의지할 수 있는 민족 공동체(예를 들면 아일랜드나 이탈리아인들의 민족 공동체)의 발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없으면 개인적인 고립상태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민족적 정체성의 강화는 계급의식과 적극적인 시민의식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단지 [과거의]미국 시스템으로 돌아가기 위해 장려된 과정이다.

오늘날 미국에는 노동자들의 정당이 없고, 있던 적도 없었다. 강력한 노조들은 어떤 의미의 정치에도 관심이 없다. 정당과의 연계가 없는 노조들은 자신들의 우려사항을 공유하고 표현할 수 없고, 사회주의적 비전을 표명할 수도 없었다. 대신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동의했고, 그 이데올로기는 도전받지 않고 있다. 쟁의가 발생해도 안건은 매우 제한되고 특수한 것이며 결코 자유주의를 문제삼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노동계급에게 공동체주의적 신념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이는 미국 내에서 가장 급진적인 세력인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공동체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투쟁은 제도화된 인종주의에 대한 투쟁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유럽” 이데올로기(그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말한다면)와 미국 이데올로기의 차이점에서 가장 간과되고 있는 측면은 계몽주의 운동이 발전과정에 준 충격이다.

계몽주의 운동의 철학은 유럽의 근대적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만들게 된 결정적인 것이었고 그 충격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초기 중심부였던 구교지역(프랑스)이나 신교지역(영국, 네덜란드)뿐 아니라 독일, 심지어 러시아에까지도 오늘날까지 무시못할 정도로 남아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계몽주의 운동은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의 후예들을 포함한 “귀족적”(노예제도를 찬성하는) 소수에게만 영향을 주었을 뿐, 주변적인 효과밖에 없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뉴잉글랜드 [청교도]분파들은 계몽주의의 핵심 정신에 영향받지 않았고 그들의 문화는 뤼미에르 형제6)의 무신론적 합리주의보다 살렘의 마녀(the Witches of Salem)7)에 가깝다.

계몽주의를 거부했던 결과는 양키 부르주아지8)가 성숙하자 나타났다.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과학”(여기서는 물리학 같은 경성 과학을 뜻함)이 사회의 명운을 결정한다는 단순하고 잘못된 신조가 나타났다. 이같은 생각은 지배계급뿐만 아니라 다수의 미국인들 사이에서 한세기 이상 널리 공유돼왔다.

과학이 종교를 대체하게 된 것은 미국 이데올로기의 두드러진 특성중 하나다. 이는 왜 철학이 그렇게도 중요성을 잃게 됐는지를 설명해주는데, 철학이 너무나도 빈약해진 경험주의로 축소됐기 때문이다. 과학이 종교를 대체하게 된 것은 또 인문사회과학을 “순수”(말하자면 “경성”) 과학으로 축소시키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설명해주고 있다. “순수” 경제학은 정치경제학을 대신하고 있고 “유전자”에 관한 과학은 인류학과 사회학을 대신하고 있다. 인류학과 사회학의 이 불행한 변이(變異)는 당대 미국의 이데올로기와 나치 이데올로기간의 또다른 긴밀한 접점을 형성한다. 이는 당연히 전(全) 미국사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뿌리깊은 인종차별주의에 의해 조장된 것이다. 과학을 바라보는 이같은 기묘한 시각에서 비롯된 또하나의 [학문적]변이는 (“빅뱅” 이론 같은) 우주론(cosomological speculation)에 대한 [미국인들의] 집착이다.

계몽주의 운동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여러 가지 사례가 있겠지만 [한가지만 예를 든다면], 물리학은 전체로서의 우주에 관한 과학(과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이 아니라 연구 대상으로 꼽을 수 있는 우주의 어떤 특정한 측면에 관한 과학이라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미국식 사고 체계는 근대적 과학 전통이 아니라 신앙과 이성의 화해를 추구했던 전근대적 시도와 더 가깝다. 이러한 퇴행적인 시각은 뉴잉글랜드의 개신교 종파가 가진 목표,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종교적인 사고가 만연한 사회에 완벽히 들어맞는 것이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것은 지금 유럽에까지 위협이 되고 있는 퇴행[적 사고방식]이다.

Ⅳ.

미국 사회의 역사적 형성에 기여한 이 두가지 요소-성경을 바탕으로 한 이데올로기의 지배와 노동자 정당의 부재는 서로 결합해 사실상의(de facto) 단일 정당 즉, 자본가 정당이 이끄는 시스템이라는 대단히 생소한 상황을 만들었다.

이 정당을 구성하는 두 분파9)는 자유주의라는 동일한 기초를 공유하고 있다. 이들 양 분파는 알맹이 없고 무기력한 형태의 민주주의에 참가하는 소수에게만(유권자의 40%에게만) 응답한다. 일반적인 노동 계급은 투표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 분파들은 중간 계급 의뢰인에게 자신들의 담론을 맞춰왔다. 양 분파는 수많은 자본주의적 이익 집단(로비)과 지역 공동체 후원 그룹으로 이뤄진 지지자들만을 자신들의 유권자로 발라냈다.

오늘날의 미국 민주주의는 필자가 명명한 “저강도 민주주의”의 가장 앞선 모델이다. 이는 선거 민주주의를 통한 정치적 삶과 자본 축적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경제적 삶을 철저히 분리, 운영하는 것에 기초해 작동한다. 게다가 이같은 분리는 어떤 형태의 급진적인 도전도 받지 않고 있다. 이는 일반적 동의(the general consensus)라고 불릴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분리 상황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창조적 잠재력을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 그것은 “시장”과 시장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무기력해진 대의제도(의회 등)를 거세시킨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미국인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투표의 결과가 아니라 금융시장과 그밖의 시장이 어디로 튀는가이기 때문에 민주당에게 표를 던지냐 공화당에 표를 던지냐 하는 선택은 결국 헛된 일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오로지 경제(사회적 문제는 철저히 무시하는 자본 같은 것들)에 복무하기 위해 존재하는 나라다. 이런 국가는 미국 사회를 형성했던 역사적 과정이 노동 계급의 정치적 의식 발전을 막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단 한가지 중심 이유로만 기능할 수 있다.

이는 유럽과 정반대의 상황이다. 유럽은 사회적 이익집단간의 대결 상황을 이미 거쳐 누구나 참여해야 하는 토론의 장을 마련해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는 유럽 국가들이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적 과정을 통한 사회적 타협을 선호하는 이유이다. 계급투쟁이나 여타 정치투쟁이 국가가 그런 식으로 기능하는 것을 강제하지 못할 때, 그리고 배타적인 자본 축적의 논리에 직면해 [국가의] 자율성을 가질 수 없을 때, 민주주의는 무의미한 행사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그런 것처럼.

종교적 관행의 지배와 근본주의적 담론을 통한 이의 확대는 피압박 계급의 정치의식 부재와 결합해 미국 정치체제에 전례없는 전략적 여유 공간을 주고 있다. 미 정치체제는 이를 통해 민주주의의 실천에 잠재한 힘을 파괴시키고 요식행위로 축소시킬 수 있다.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정치, 치어리더를 동원한 선거운동의 시작 등)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미혹케 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정치체제의] 지휘부를 장악하고 있으면서 권력의 실소유자-자본과 정부내에 있는 자본의 충복들-에게 논리를 부여하는 근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만이 모든 결정을 할 수 있고 그렇게 했을 때에만 자본은 미국 이데올로기를 동원, 그 목적에 복무한다. 전례없고 체계적인 잘못된 정보의 유통이라는 수단은 비판자들을 격리시키고 그들에게 지속적이고 혐오스런 협박을 가함으로써 그 목적에 복무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미국의 기득권층은 (대중들의) 아둔함을 길러냄으로써 쉽게 “여론”을 조작할 수 있다.

이같은 상황 덕분에 미국의 지배 계급은 위선으로 포장된 일종의 총체적 냉소주의를 개발해왔다. 해외의 관찰자들은 그 위선을 뚜렷이 직시했으나 미국인들 스스로에게는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 체제는 필요하다면 가장 극단적인 방법의 폭력에라도 의지함으로써 무척 편안했던 것이다. 급진적인 미국 활동가들만이 이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열려진 옵션은 매수당하거나 어느날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모든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미국 이데올로기는 “점차 구식으로 낡아지고” 있다. 평온의 시대-경제성장과 용인될 수 있을 정도의 사회적 부작용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동안 인민에 대한 지배계급의 압력은 자연히 완화된다. 따라서 기득권층은 고전적인 방법을 쓰는 그 이데올로기를 때때로 부활시켜야 한다. 적(미국 사회는 선(善)이라고 규정되므로 적은 언제나 외국인이다)이 지정되어(악마의 제국10), 악의 축) 그를 제압할 모든 가능한 수단의 동원을 정당화할 것이다. 과거에 적은 공산주의였다. 매카시즘(오늘날 “미국인 편에 서기(pro-Americans)”에 의해 잊혀진 현상)은 냉전의 시작과 유럽의 주변화를 가능케 했다. 오늘날 미국의 적은 “테러리즘”이다. 이는 명백히 구실에 불과하며 전 지구에 대한 군사적 통제라는 지배계급의 실제 목표에 복무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있다.

미국의 새로운 헤게모니 전략이 공언하고 있는 목표는 워싱턴의 명령에 저항할 능력이 있을 법한 다른 어떤 세력의 등장도 막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호”를 위해 미국 군사기지를 받아들일 준비와 의지가 있는 최대한 많은 위성국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너무 “커버린” 나라들을 해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명의 최근 미국 대통령들(아버지 부시, 클린턴, 아들 부시)이 일치하듯, 오로지 한 나라만이 “클” 권리를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미국 헤게모니는 결국 어떤 특별한 경제 시스템의 “이점”에 의존하기보다는 비대칭적 군사력에 의존하고 있다. 그 힘 덕분에 미국은 지구적 마피아의 도전받지 않는 두목노릇을 할 수 있으며, 그들의 “보이는 주먹(visible fist)”11)은 그것이 없다면 같이 있기조차 꺼려할 나라들에게 새로운 제국주의적 질서를 강요할 것이다.

최근의 성공에 고무된 극우파들은 지금 워싱턴에 있는 권력의 고삐를 단단히 쥐고 있다. 나와 있는 선택지는 명백하다. 미국 헤게모니와 그것이 퍼뜨리고 있는, 돈벌이에 대한 특유의 집착 밖에는 의미하는 것이 거의 없는 초강력 “자유주의”를 따르거나 이를 거부하는 것. 이에 따르게 될 경우는 워싱턴이 세계를 텍사스 이미지로 자유롭게 “재구성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거부 옵션을 선택함으로써만 우리는 세계를 본질적으로 다원주의적이고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것으로 재건할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1935년이나 1937년 유럽이 [나치에] 어떤 조치를 취했다면, 유럽인들은 나치의 광기가 그토록 많은 피해를 주기 전에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치를] 1939년까지 미룸으로써 그들은 수천만의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했다. 워싱턴의 신(新)-나치적 도전을 봉쇄하고 제거하기위해 지금 행동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책무다.

<역주>

1) 1933년 2월 독일 제국의회 의사당 방화사건. 히틀러는 이 사건을 공산당이 저질렀다고 주장, 공산당을 억압하고 반대파에 대한 대탄압을 강행했다. 이어 총선거에서 승리해 의회에서 전권(全權)위임법을 성립시킨 히틀러는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2) 히틀러 자서전 ‘나의 투쟁’을 빗댄 말

3) 미 북동부 메인·뉴햄프셔·버몬트·매사추세츠·코네티컷·로드아일랜드의 6주에 걸친지역.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을 떠나온 청교도들이 살던 곳으로 미국 건국의 중심지였다.

4) 막스 베버의 저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나온 명제

5) 1871년 파리코뮌 가담자와 지지자들을 칭함

6) 1895년 최초로 영화를 상영해 근대 영화의 시작이라 일컬어지는 뤼미에르 형제. 무신론적이고 합리주의적인 근대성을 뜻함

7)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살렘시에서 일어났던 마녀재판 히스테리를 빗댄 말로 뉴잉글랜드 청교도 문화의 중세적 의식구조와 기득권층의 집단적 사고방식, 그로인한 이성의 마비와 우상 숭배적 사고를 뜻함

8) 뉴잉글랜드 지방 영국 이민자들로 구성된 부르주아계급

9) 공화당과 민주당을 뜻함

10) 레이건 행정부 시절 소련을 ‘악마의 제국(evil empire)’라고 칭한 것을 뜻함

11) 아담 스미스는 시장을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라고 칭했고 이에 마르크스는 시장을 ‘보이지 않는 주먹(visible fist)’이라고 했는데 이를 빗댄 말
관련 링크 ( http://weekly.ahram.org.eg/2003/638/focus.htm )
사미르 아민/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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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 목록 2024. 04. 18.  전체글: 110  방문수: 147449
55 ‘국가안보’ 빙자 인권유린 안돼/박원순 이정호2004.09.09.989
54 ‘간첩’도 민주주의를 지켰다/한홍구 이정호2004.07.26.1010
53 과연 '올 것'이 온 것인가 /손석춘 이정호2004.06.23.949
52 누가 감히 한 줄 시로 '5월'을 노래할 것인가/펌글 이정호2004.05.18.935
51 룡천 소학교 아이들아/ 김용택 이정호2004.04.28.946
50 '조중동이 재판 끝내고 법원은 추인' 이정호2004.04.14.1025
49 젊은 그대 ...딱 30분만 시간을/김정란 이정호2004.04.13.948
48 탄핵사태, 그 역사적 본질/ 박노자 이정호2004.04.05.955
47 야만과 모멸의 조국 - 송두율 교수에 징역 7년 이정호2004.03.30.947
46 민중의 함성, 그것이 헌법이다/도올(펌글) 이정호2004.03.29.946
45 탄핵정국에 가려진 놓칠 수 없는 뉴스 5가지(펌글) 이정호2004.03.24.954
44 서울엔 비가 내린다. 웃음의 혁명이 내린다/이병창 이정호2004.03.18.946
43 3월 12일 오늘, 대한민국 국민임이 부끄럽다 /고태진 이정호2004.03.13.994
42 ‘야만의 정치’로 후퇴한 날 이정호2004.03.13.988
41 송두율 교수의 법정 최후진술 이정호2004.03.10.947
40 탄핵정국-시민단체 반응/오마이뉴스(펌글) 이정호2004.03.09.954
39 "WTO는 진실을 말하라" - 故이경해씨의 명복을 빕니다. 이정호2003.09.11.1024
38 “부시 뒷다리만 잡고 가면 패망할텐데" /프레시안 이정호2003.08.08.1001
37 미국 이데올로기는 종교적 근본주의/사미르 아민 이정호2003.05.28.940
36 수경스님이 쓰러지셨습니다/김은태 이정호2003.05.22.948
35 자기 무덤 파는 '조중동' /강준만교수 이정호2003.05.05.923
34 예산 보성초등학교 S교장 자살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이정호2003.05.05.2517
33 조선일보는 사회악이다 이정호2003.05.04.1048
32 "동북아정세 심각한 변화 올 것"/리영희선생, 이정호2003.04.11.924
31 국익론의 허구/송경아, 지식문화의 초라한 몰골/안병욱 이정호2003.03.28.913
30 미국의 침략전쟁 반대!/WTO 반대 국민행동 이정호2003.03.22.944
29 세상을 살며 핑계 대고 변절 말자/서준식 이정호2003.03.15.958
28 대구 지하철 참사, 근본원인은 무엇인가/y 이정호2003.02.24.953
27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이정호2003.02.22.950
26 파시즘의 얼굴을 한 부시대통령/귄터 그라스 이정호2003.02.21.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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