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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안보’ 빙자 인권유린 안돼/박원순
글쓴이: 이정호  날짜: 2004.09.09. 09:50:52   조회: 989   글쓴이IP: 219.248.201.32
‘국가안보’ 빙자 인권유린 안돼

[기고]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오늘날 국가보안법을 둘러싸고 오가는 논쟁을 바라보면서 드는 것은 오직 무거운 침통함이다. 과연 이 나라가 내일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국가보안법이 대체 어떤 법인가. 수많은 노동자·학생·지식인들이 그 사슬에 고통받고, 이름 없는 민중들이 막걸리 한 잔 하다가 한마디 말실수 끝에도 잡혀가 고초를 겪고, 예술가들이 꿈에서도 악몽을 꾸어야 했던 법이 아니던가?

‘보안법 폐지’ 정쟁대상 아니다

선견지명이 있던 제헌 국회의원 몇 분은 이미 이 법의 제정 당시에도 고문과 악용을 예언했고, 그래서 입법 추진자들조차 단지 여순사건 등의 극단적인 치안상황에서 한시적으로 만드는 비상입법이라고 했던 법이 아닌가. 우리 모두 존경해 마지않는 김병로 대법원장이 1953년 4월16일 형법 제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6·25 사변을 당해 국가보안법 혹은 비상조치법이 임시로 제정되었지만 이제 이 형법만 가지고 우리 형벌법의 목적을 달할 수 있겠다”고 말한, 바로 그 법이 아니던가. 58년 이른바 ‘2·4 파동’으로 오늘날 국가보안법의 원형인 옛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킬 때,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라고 <동아일보>를 비롯한 당시의 언론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저항하고 반대했던 법이던가. 그 기나긴 군사독재 정권이 끝나면 제일 먼저 없어질 것으로 생각했던 바로 그 법이 아니던가.

국가보안법은 본디 ‘국가 안보’와는 거리가 멀었다.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형법상의 간첩죄도 있고, 군사기밀 보호법도 있다. 오히려 형법상의 간첩죄도 남용되기 일쑤였다. 미국처럼 우리의 간첩죄도 요건이 강화되어야 한다. 대법원은 “적에게 알려져 적에게 유리하고 우리에게 불리해지는 일체의 정치·경제·사회적 사실”이 모두 ‘기밀 사항’이라며 아무 죄없는 시민들을 버리고 민주주의를 유린하던 권력의 편을 들곤 했다. 감히 말하건대 당시 그런 판결을 내리곤 했던 사법부가 추호의 반성도 없이 국가보안법이 합헌이라고 선고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법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로 국가보안법의 올가미를 쓴 채 재판을 받던 수많은 사건들의 피고인과 그들을 보호해 줄 마지막 보루로서의 용기와 양심을 버렸던 판사들을 기억하고 있다.

유엔인권이사회도 개폐 권고

한나라당이 ‘국가 수호 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고 밝혔다. 국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도대체 한나라당이 지향하는 ‘국가 정체성’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미 역사적으로 ‘인권 침해법’으로 증명된 국가보안법을 지키는 것이 한나라당의 ‘정체성’이란 말인가. 나는 평소에 노무현 대통령의 여러 정책들을 비판해 온 사람이다. 이번에 그가 국가보안법에 대하여 말한 것은 옳았다. 한나라당도 냉정히 생각하여 대통령의 옳은 정책에 대해서는 지지해야 마땅하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신장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기꺼이 협력해야 한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과거 대법관 시절에 국가보안법의 위헌성을 제기한 명판결을 해 놓고 정치인이 되어서는 국가보안법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다가 결국 대통령의 꿈마저 놓치지 않았던가. 수구냉전적 사고의 의원 몇 사람 견해에 따라가다가 한나라당이 반민주·반인권 정당으로 낙인 찍히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것은 정쟁의 대상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신뢰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정당과 학자들과 시민들이라면 당연히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주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보안법은 ‘나라 안보’를 빙자한 인권 남용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의 문제점은 이미 여러 계기에 의해 증명됐다. 저명한 인권법 전문가로 구성된 유엔인권이사회는 아무리 남북한의 특수상황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인권 보장과 양립할 수 없다고 한국 정부에 개폐를 권고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정부가 비준·공포한 국제인권규약을 위반하고 있다. 아니, 인류가 성취한 천부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나는 오늘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이 바로 이 하나의 문제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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