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읽기

2024. 04. 26.

누가 감히 한 줄 시로 '5월'을 노래할 것인가/펌글

글쓴이: 이정호 날짜: 2004.05.18. 12:14:37 조회: 937 글쓴이IP: 203.249.43.172

누가 감히 한 줄 시로 '5월'을 노래할 것인가
아카시아 향 진동하는 날들 속에서 그날의 광주를 떠올린다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홍성식(poet6) 기자

그들의 죽음에는 '죄'가 없었다

88년 5월이었다. 모모한 경로를 통해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 손에 '불온서적' 한 권이 들어왔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만든 <5월항쟁 사진집>. 온통 시뻘건 표지의 그 책은 갓 읽기 시작한 몇 권의 시집과 막 배우기 시작한 소주 맛에 들떠 철없이 찧고 까불던 열여덟 문학소년의 가슴을 붉은 눈물로 물들였다.

미국산 M-16 소총이 뿜어낸 총탄에 머리가 깨어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아저씨, 곤봉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로 리어카에 실려 있던 20대 청년, 그리고 놀라워라.

시체 중엔 내 또래 여고생도 있었다. 무슨 못다한 말이 있는지 치켜뜬 눈. 열일곱 소녀의 부끄러움을 가려주던 교복 상의는 함부로 말려 올라가 사진임에도 감히 마주 보기가 면구했다.

인간보다 신과 교의(敎義)가 우위에 있었기에 '암흑의 세기'로 불리던 중세도 아닌 현대에, 그것도 바다 건너 이름 생경한 어느 독재국가가 아닌 바로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80년 5월의 대학살이 이민족이 아닌 한 핏줄의 군인들이 저지른 범죄임을 알고 나는 경악했다. 그 처참한 죽음의 배후에는 '전두환과 노태우, 정호용과 박준병, 그리고 미국이라는 괴물이 있다'는 걸 들려준 선배를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짧았다.

그해 3월에 읽었던 김남주의 시집. "나는 시인이 아니라 전사(戰士)로 불리고 싶다"는 그가 왜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라, 오월은 그처럼 서정적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았나니"라고 노래했는지도 동시에 깨달았다.

그로부터 16년. 아직도 나는 <5월항쟁 사진집>의 첫머리에 실린 김준태의 시 '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의 첫 구절을 눈가가 시린 아픔 없이 떠올릴 자신이 없다.

아아,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여
고통의 면류관을 쓰고
죽음과 죽음 사이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학살의 80년대가 끝나고 말 많은 이들이 '희망의 시대'로 규정했던 90년대에 나의 20대는 시작됐다. 그러나 많은 수의 그 시절 청년들이 그랬듯 나 역시 80년대에 대한 부채감과 부끄러움, 그리고 절제할 수 없는 복수심에 5월만 되면 강의실이 아닌 아스팔트에서 청춘의 나날들을 보내곤 했다.

누가 스무살 어린아이를 거리에서 싸우게 만들었나

그 일 또한 이미 10년이 넘은 기억이지만 그때 부른 '피의 노래'의 2곡은 아직도 뇌리에 선연하다.

"동지들 모여서 함께 나가자/무등산 정기가 우리에게 있다/무엇이 두려우랴/출정하여라/영원한 민주화행진을 위해/나가~ 나가~ 도청을 향해/출정가를 힘차게~ 힘차게 부르세"라던 광주출정가와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라고 절규하던 오월의 노래.

끝끝내 시를 쓰고자 했던 '낭만적 서정'과 눈 앞에서 벌어지는 오욕의 역사를 좌시할 수 없다는 '이성적 당위'의 갈등은 연약한 내 가슴속에서 오랫동안 지속됐다.

역사의 본질을 시 속에 녹여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원대한 욕망은 빈한한 내 재주로는 결코 이뤄낼 수 없는 '불능' 다름 아니었다. 하여, 5월 내내 최루탄과 소주에 취해 살던 94년 봄엔 이런 낙서를 남기기도 했다.

교만스런 왕녀의 걸음으로
5월은 왔다
광주공원에선 치매의 노인들이
절뚝이며 꽁초를 줍고
빛나는 햇살에도
등교길 아이들의 머리는
자꾸 아래로만 향하는데

다시 거리로 나서면
모두는 붉은 깃발 아래
푸르뎅뎅한 얼굴
겨우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 머리 위로 가랑비 떨어진다
초록우산을 받쳐 쓴 소녀의
하이얀 목덜미와 팔뚝엔
아직도 학살자의 낙인이 선명한데

죽음과 부끄러움
그 사이론 어떤 빛깔의
비가 내리고 있는가.
-- 졸시 '서정시 쓰는 5월'

낭만과 당위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할 줄 알던, 그래서 순수했던 그 스물넷 청년이 이젠 삼십대 중반의 '더 이상 희망 없는' 나이가 됐다. 다시 1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우리는 왜 지레 늙어가는지...

그러나 아직도 나, 대체 '5월'이 내게, 아니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앞으로도 천 년은 아물지 않을 광주의 상처를 어느 누구도 한 줄의 시와 한 곡의 노래로는 울어줄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5월이다. 24년 전 진압군의 조준사격에 쓰러진 그 여고생의 무언가를 말하려는 눈동자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향해 "원수는 용서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갚으라고 저기 저렇게 퍼렇게 살아 있다"고 외쳤지만, 복수의 칼을 들고 거리로 나서기에 나는 이미 너무 비겁해져 있고, 겉늙어 있다. 그런 까닭에 더 참혹한 2004년 5월. 힘없는 우리는 그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낡은 LP를 꺼내 최문정이 부르는 '오월의 노래'를 조용히 따라 읊조릴 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무엇때문에 아직 살아 있는가?

봄볕 내리는 날 뜨거운 바람 부는 날/붉은 꽃잎 져 흩어지고 꽃향기 머무는 날/묘지 없는 죽음에 커다란 이름 드리오/여기 죽지 않은 목숨에 이 노래 드리오/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이렇듯 봄이 가고 꽃피고 지도록/멀리 오월의 하늘 끝에 꽃바람 다하도록/해 기우는 분수가에 스몄던 넋이 살아/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이여/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2004/05/12 오후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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