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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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악마(손석춘칼럼)
글쓴이: 이정호  날짜: 2002.06.12. 09:47:06   조회: 563   글쓴이IP: 211.207.72.135
붉은 악마/ 손석춘 -한겨레 6.11-


대한민국이 붉게 물들었다. 서울 광화문과 시청광장도 여울여울 붉었다. 10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붉은 바다를 이뤘다. 옹근 15년 전 6월항쟁 뒤 처음이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음에도 젊은 세대들은 하나가 되었다. 조국의 이름을 불렀다.

그랬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최루탄에 맞섰던 6월항쟁의 그 날도 그랬다. 항쟁에 나선 젊은 벗들은 이 땅의 언론 문법으로는 `붉은 악마'였다. 대다수 언론은 민주주의를 외친 젊은 벗들을 살천스레 `빨갱이'로 몰았다. 마녀사냥은 15년이 흐른 오늘도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기어이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이적단체로 불법화했다. 앞다퉈 국가보안법을 `사수'하며 사상을 검증했다. 김대중 정권도 좌파라는 저들의 주장은 희극이자 비극이다.

붉은 색이 부담스러워서일까. 붉은 악마 사무국은 `비정치·비사상'을 선언했다. `비정치의 정치'를 굳이 거론할 뜻은 없다. 대~한민국을 소리 높여 부르는 붉은 악마를 폄하할 뜻은 더더욱 없다. 붉은 악마의 순수한 열정과 자발적 참여 두루 아름답지 않은가. 다만 오늘의 붉은 악마에 증언하고 싶다. 6월항쟁 그 날의 붉은 악마 또한 순수했고 헌신적이었다. 바로 그 점에서 15년을 사이로 광화문을 가득 메운 붉은 물결은 이어진다. 기실 붉은 색은 아름답다. 슬라브 어원에서 `붉은'은 곧 `아름다운'을 뜻한다. `최초의 사람' 아담의 어원에도 `붉은'의 뜻이 담겨있다. 유럽의 근대사에서 빨강은 박애를 상징한다. 좌파가 붉은 깃발을 든 이유도 `사랑'에 있다. 정반대로 수구세력은 좌파를 상대로 핏빛 사냥을 즐겼다. 붉은 색은 분단된 이 땅에선 더더욱 금단의 색깔이었다. `좌파'라는 말조차 온전히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 좌파는 늘 붉은 악마였다.

하지만 본디 좌파는 한국정치에서 강력했다. 해방공간에서 미군정이 전국을 대상으로 지지이념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우리 겨레의 77%가 사회주의라고 답했다.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에 진보당 조봉암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을 위협했다. 5·16쿠데타 뒤 윤보선이 색깔공세를 폈을 때 오히려 박정희의 표가 늘어나기도 했다. 좌파의 몰락은 쿠데타세력의 야수적 탄압 때문이었다. <민족일보> 발행인을 처형하며 등장한 군사정권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며 30년 동안 좌파를 짓밟았다. 탄압의 정당화는 온새미로 언론 몫이었다. 6월항쟁으로 좌파가 다시 정치 무대에 등장한 뒤에도 전혀 변함이 없다. 언론은 선거공간에서 진보정당을 언제나 시들방귀로 여겼다. 끊임없이 좌파를 붉은 악마로 훌닦았다. 유럽 대다수 나라에서 집권하고 있는 진보정당이 이 땅에 의석 하나 없는 가장 큰 까닭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언론은 지방선거에 나온 진보정당 후보를 홀대한다. 가령 붉은 악마가 붉게 물들인 서울을 보라. 민주노동당 이문옥 후보와 사회당 원용수 후보 두루 `평등 서울'을 다짐했다. 하지만 두 후보의 `새로운 서울'은 대다수 시민들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신문과 방송의 은폐 탓이다. 이 후보는 `반부패 특별시장'을, 원 후보는 `사회주의 서울'을 내세웠다. 저렴한 의료체계나 대중교통 무료화 등 서울 시민의 삶을 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정책들을 내놓았지만 언론은 모르쇠다. 기껏 보도하더라도 언죽번죽 조롱한다. “비현실적이다.”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정책들이다.

집·일터가 보장되고 교육·의료가 무료인 세상은 6월항쟁을 불지핀 붉은 악마들의 오랜 꿈이다. 그 정책을 구현할 진보정치인이 언젠가 서울 시장은 물론이고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먼 미래가 아니다. 그 날은 우리의 상상보다 더 빨리 올 수 있다. 붉은 악마가 보여준 젊은 세대의 해맑은 열정은 수구정치·수구언론에 찌든 대~한민국의 희망이다.

손석춘/ 논설위원s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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