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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똥과 된장 - 수구와 참된 보수의 차이(한홍구교수)
글쓴이: 이정호  날짜: 2002.06.12. 10:06:33   조회: 605   글쓴이IP: 211.207.72.135
한겨레21(2001년08월08일 제371호)
[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에서 옮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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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보수’를 아십니까

‘똥과 된장’만큼 나는 수구와 보수의 차이,
장엄히 사라져간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배운다


세상이 시끄럽다.
악령이 떠돌고 홍위병이 설치고 사회주의자들이 날뛴다고 한다.
그리고 저들은 외친다.
“우리는 보수다. 우리를 수구(守舊)로 매도하지 말라!”

수구란 원래 보수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뜻이다.
반동(reaction)은 보수와는 다른 하나의 역사적 개념일 수 있으나
수구는 그런 것도 아니다.
한영사전을 찾아 봐도 수구는 보수와 같이 ‘conservatism’으로 나온다.
우리가 쓰는 수구와 가까운 말로 ‘ottantottism’이 있기는 하나
웬만한 영어사전에는 나오지도 않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보수와는
다른 의미로 수구란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보수… 수구… 반동… 파시스트


1993년 무렵, 그러니까 소련과 동구에서의 사회주의의 실험은 실패하고
대통령선거에서 ‘보수대연합’을 통해 탄생한 민자당이 승리하여
진보진영이 깊은 좌절에 빠져 있던 때였다.
누구는 “잔치는 끝났다”고 하고, ‘
회개’한 운동권은 ‘돌아온 탕아’로 스타가 되고,
이른바 후일담 문학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말이 있다.
“정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변해야 한다”고.

이 말이 난파선 같아보이던 운동권 내에서 유행한 말이었지만,
정작 이 말은 보수주의를 가장 정확히 표현한 말이며,
보수와 수구를 가르는 계선을 보여주는 말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지혜로서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맹목적으로 전통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정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버릴 것을 버릴 줄 알고,
개혁을 주장하고 최소한 포용하는 사람들이다.
서구에서 근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버크는
프랑스혁명과 같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인 개혁을 옹호했으며,
성공적인 보수주의 정치가였던 디즈레일은
자유주의적 급진개혁을 예방하기 위해
1867년 자유주의자들의 구상보다
훨씬 더 혁신적인 선거법 개혁을 단행했다.
수구를 가리켜 흔히 반동이라고도 하고 파시스트라고 하는데,
역사적으로 정확한 개념의 사용은 아니다.
반동이야 혁명적 상황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을 베트남 패망 직전의 상황과 같다고 하는
이들의 눈에는 혁명적 상황으로 보일지 모르나,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공동여당의 ‘원조 보수’에 발목이 잡혀
아무런 개혁도 하지 못했던 상황에 좌절을 느꼈을 것이다.

또 파시스트들은 기존의 권위를 누구보다도 과격하게 파괴했다는 점에서
수구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수구와 반동과 파시스트,
어떤 게 더 나쁘냐를 따지는 것은
짐승만도 못한 놈과 짐승보다 더한 놈 중
누가 더 나쁘냐를 가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논리적으로 짐승만도 못한 놈과
짐승보다 더한 놈은 큰 차이가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일어난 불행한 일이 많이 있지만
요즈음의 사태를 보면서 자꾸 떠오르는 생각은
건강하고 합리적인 보수주의가
이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무리 분단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는 500년의 역사를 지닌 왕조가 쓰러진 자리에
건설된 나라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보수주의가 허약하다.
조선을 가리켜 당파싸움으로 날새우다가 나라를 빼앗겼다고
식민주의자들뿐 아니라 일제 초기의 민족주의사학자들도 통탄했다.
그러나 조선이 5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입장에서 고루한 유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합리적 보수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전통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전통의 내용이 과연 어떤 것일까?
보수주의자들은 ‘뿌리없는 것’에 대한 깊은 혐오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 보수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뿌리없음이며, 전통적 보수주의와의 단절이다.
게나 고둥이나 다 보수주의자라고 목청을 돋우는
이 부박한 시대에 우리는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이
이땅에서 어떻게 장엄하게 사라져갔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건창(李建昌). 그는 동학교도들이 난을 일으키자
짐승을 사냥하듯 소탕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한 보수주의자였다.
5살에 글을 지은 신동은 조선 전기에 매월당 김시습이 있고,
후기에는 명미당 이건창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건창은 신동이었다.
15살 어린 나이에 과거에 올라 20대에는 암행어사로 이름을 떨쳤다.
암행어사로, 또는 민란을 수습하는 안핵사로서
그는 보통 고을 원님이 아니라 도지사인 관찰사를
두명이나 파직시킨 강골이었다.
오죽하면 고종이 지방관을 임명할 때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을 보낸다고 엄포를 놓았을까?
동학농민군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의 어려운 처지에 공감하고,
그들을 난에 이르게까지 한 학정을
더 매섭게 비난한 사람이 이건창이다.
창강 김택영(滄江 金澤榮)이 고려와 조선 천년을 통해
아홉 사람의 문장가를 꼽았을 때
그 마지막을 장식한 이가 바로 이건창이었다.
그는 조선 후기 사상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강화학파의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동학교도를 때려잡아 죽이라 했지만…


이건창의 할아버지 이시원(李是遠)은
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범한 병인양요 당시에
아우와 함께 양잿물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이시원은 강화도령이었던 철종이 임금이 된 뒤
강화에 어진 이가 살고 있다던 옛 소문을 듣고
등용하여 잠시 이조판서를 지낸 바 있었다.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에 상륙하자 가족들은
그에게 울면서 피난을 갈 것을 청하였다.
78살의 노령에 이질이 걸려 몇달째 자리보전을 하고 있던 이시원은
피난이 무슨 말이냐며 관원들이 다 도망을 가
순사한 자가 하나도 없는 마당에 향대부(鄕大夫)마저
도망을 가면 후세의 사가들이 무어라 하겠느냐고 꾸짖었다.
그리고는 들것에 실려 조상의 산소를 돌아보고
동생과 함께 약을 먹고 태연히 담소하다가 세통의 유서를 남겼다.
한통은 손자 건창에게, 다른 한통은 일가 식솔들에게,
그리고 약기운이 퍼져 채 끝내지 못한 마지막 한통을 막내 아우에게.

열다섯 어린 이건창은 이 장엄한 의식을 목격하며 자랐다.
그렇다고 이건창이 할아버지의 자결에 발목을 잡혀
위정척사파나 수구파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중국 사정에 정통했고,
개화당의 인물들과도 깊이 교류했다.
이건창은 개화당의 사상적 지주였던 강위(姜瑋)의 제자이기도 했으며
강위와 함께 바깥 세계를 돌아보기를 원했으나
강위가 나이들고 병약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개화파는 갑신정변 때나 갑오경장 때나 학식과 명망이 높고
바깥 세상물정을 아는 이건창과 손잡고 일하기를 원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다.
이건창이 정녕 못 견뎌 한 것은 개화 그 자체가 아니라
개화파의 부박함이었다.
김옥균의 경솔함이나 어제의 신하였던 서재필이 돌아와
임금 앞에서 뒷짐을 지고 있는 뿌리없는 태도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닌 밤중에 총칼로 무장한 일본 군대가 기습해 들어와
서울의 요소와 궁궐의 안팎을 점령한 것이
무엇이 그렇게 경사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나라 체모를 뜯어 고친다고들 하니
이것이 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고 탄식했다.
고종이 높은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거듭되는 사직소에
고종은 벼슬을 살 테냐 귀양을 갈 테냐 양자택일을 하라 하자
그는 태연히 귀양길에 올랐다.
뒷날 돌아오지 않은 밀사가 된 이상설(李相卨)이
신새벽 남대문 밖에 주안상을 차려놓고
귀양길 떠나는 이건창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건창과 그의 벗들은 단발령도 반대했다.
그러나 그들의 반대이유는
“내 머리는 잘라도 내 상투는 못 자른다”던
위정척사파의 거부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건창의 6촌 동생으로 위당 정인보를 키운
이건방(李建芳)은 애당초
“상투를 자르고 안 자르고가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건창의 벗 김택영이 중국 망명 생활중에
청나라 사람처럼 변발을 하고 지낸 것을 보면
이건방의 말은 빈말이 아니다.

이 원칙주의자 이건창이
1898년 47살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보고 싶어 차마 눈을 감지 못하겠다던 벗이
바로 팔백리 밖 구례의 촌선비 매천 황현(梅泉 黃玹)이었다.
<매천야록>을 남긴 역사학자이자
당대 최고의 시인인 황현도 동학난을 일으킨 무리들을
깡그리 잡아 죽여야 한다던 보수주의자였다.
시골 선비라 차별을 받아 과거에 떨어지고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부모의 원을 풀었으나
도저히 벼슬길에 나갈 마음이 없었다.
도깨비 나라의 미친놈들 속에 들어가 미친 도깨비가 되라 하느냐며
황현은 초야에 남았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황현은
이건창의 동생 이건승(李建昇)으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았다.
“황운경(운경(雲卿)은 황현의 자(字)임)은
아직도 인간세상에 머물고 있소?
나는 어리석고 미련하여 구차하게 살아 있을 따름이외다”라고.
이건승은 정원하(鄭元夏)와 함께 약을 먹고 자결하려 하였으나
식구들이 눈치를 채고 약사발을 뺏어버렸다.
그때 정원하는 약그릇을 빼앗기자
칼로 자결하려고 날이 선 칼날을 잡고 가족들과
승강이를 하다가 한손을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되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이 기정사실로 된 1909년 황현은
이미 땅 속에 누은 이건창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하기 위해 천리길을 걸어
그의 무덤을 찾아 시를 읊는다.
“그대 홀로 누은 것 서러워 마소,
살아서도 그대는 혼자가 아니었던가.”(無庸悲獨臥 在日已離群)


고향에 돌아온 황현에게 끝내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그는 아편을 준비했다.
그 밤 조선의 마지막 대시인인 황현은 절명시(絶命詩)를 짓는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 일을 생각하니,
지식인이 된다는 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다.”
(秋燈俺券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몇 해 전 첫 손자를 보았을 때 갓난아이에게
글 아는 사람이 되어라하고 축원해 주었던 그 황현이었다.

벼슬을 살지 않은 포의의 황현이었다.
그는 유서에서
“내가 꼭 죽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라며
“황은이 망극해서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지만”
500년 선비를 키운 나라에서 나라가 망하는 날에
죽는 사람이 하나 없다면 어찌 통탄할 노릇이 아니겠냐며
치사량의 아편을 먹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몇 번이나 목숨을 버리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지만 오늘은 참으로 어찌 할 수 없어
목숨을 끊는다고 절명시에 썼다.
그런 황현이 약기운이 퍼져갈 때 동생에게 웃으며 고백을 한다.
“죽는 것도 쉽지 않아.
내가 약을 마시려다 입에서 약사발을 세번이나 떼었어.
내가 그처럼 어리석다네.”

보수주의자 이건창은 병으로, 황현은 음독으로
각각 ‘시대와의 불화’를 마무리하자
이건창의 동생 이건승과 동지 정원하와 홍승헌은
멀리 만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씩 송장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당대 명문의 후예인 보수주의자들이
신학문을 배우는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자금을 댔다.
그리고 나니 정작 자신들의 몸을 거둘 관을 살 돈도 없어
가난한 동포들이 한푼두푼 모아 마련해준 관에 몸을 누이고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너무 가슴이 아파 도저히 단숨에 읽을 수 없는
민영규 선생의 ‘강화학 최후의 광경’이란
글이 보여주는 보수주의자들의 장엄한 최후는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저릿저릿한 감동을 불러온다.


‘편’이란 이념만으로 갈리는 것일까


그들만이 아니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석영(李石榮),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형제들.
모두 판서의 자제로 한분은 양자로 가서 영의정의 아들이요,
한분은 고종의 측근이요,
다른 한분은 영의정 김홍집의 사위였다.
그 6형제가 많은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가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다.
그 지체높은 집안의 부인들이 독립군 뒷바라지를 한다는 것은
전에 집에서 부리던 종들을 위해
밥을 짓고 빨래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몇 해 지나지 않아 가져간 재산이 떨어지자
대가댁 마님들이 몸파는 여자들 옷을 지어주며 생계를 꾸린다.
70년대, 80년대 대학생들이 ‘위장취업’을 한 것이
기득권을 버린 것이라지만 어찌 여기에 비길 수 있을까?

옛 보수주의자들의 행동을 보며
요즈음의 편가르기 논쟁과 관련하여 드는 생각은 편이란 것이
꼭 이념만으로 갈리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이다.
이건창이나 황현같이 동학농민군을 때려잡자고 한
보수주의자들의 행적은 수구세력이 보기에
홍위병임에 틀림없을 필자 같은 사람에게도 너무나 감동적이다.
이념의 문제라고만 하기에는 한국의 이른바 진보파는
그 뿌리부터 너무 보수적이다.
장준하, 함석헌, 문익환, 계훈제, 김수영, 이영희 등
실천과 이론으로 한국의 재야와 진보진영에 뚜렷한 영향을 끼친 분들이
해방 직후 또는 한국전쟁 전후에 보인 행적을 보자.
장준하는 극우민족단체 민족청년단 간부,
함석헌은 신의주반공의거의 배후이자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한 사상가,
문익환은 미군 통역장교,
계훈제는 우익 반탁진영의 행동대장,
김수영은 의용군에 나갔다가 탈출하여
거제도에 수용된 뒤 남쪽을 택한 반공포로,
이영희는 국군 장교 등이었다.
이 정도 경력이라면 이 관제 ‘빨갱이’들의 사상적 검증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닐까?
그들은 민족분단의 특수상황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일제가 우리 민족에 남긴 해악이 참 많고 많지만,
이땅에서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진영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분들을
친일에 동원하여 그들의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기게 한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서정주마냥 권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딘들
다 쫓아가 용비어천가를 부른 사람도 있지만,
친일지식인이란 낙인이 찍힌 사람들 대부분은
일제의 강압을 견뎌내지 못하고 마지못해서
또는 겁이 나서 시키는 대로 한 사람들이다.
일제는 멀쩡한 비단옷을 가져다가 걸레로 쓴 것이다.
그들도 이건창이나 황현처럼 지식인되기 참 어려운 시대를 만났지만
그들처럼 원칙을 지키지도 못했고, 목숨을 끊지도 못한 채
구차히 살다가 욕을 본 것이다.
그들 자신의 불행일 뿐 아니라 민족의 불행이기도 한 것은
해방 이후 극심한 좌우대립 상황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씻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설 땅이
일제 말기의 친일행위로 인해 사라졌다면,
진보적 지식인들은 한국전쟁과 민간인학살 와중에
철저히 이땅에서 사라졌다.
새가 하늘을 나는 데 필요한 좌우의 두 날개가 모두 꺾인 것이다.
그리고 이남에서 정권은 백범 김구 선생처럼
너무나 보수적인 분을 여순반란사건의 배후조종자인
빨갱이로 몬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
그들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의 덕목인
도덕성, 일관성, 책임감, 지혜 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당치 않은’ 족속들이다.
그들은 한번도 정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린 적도 없고, 희생한 적도 없다.
한국전쟁 때 마오쩌둥도, 미8군 사령관 벤플리트도 아들을 바쳤지만
그들은 한강다리를 끊고 가장 먼저 도망갔다가 돌아와
남은 사람들을 부역자로 몰았다.
그들은 일본의 보수주의를 흉내냈지만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
러일전쟁 때 너무 큰 희생 때문에
일본 시민들이 노기 사령관에게 항의하러 부두에 나갔다가
아들 셋의 유골을 안고 배에서 내리는 노기 앞에서
같이 울었다는 일화가 있으나
우리의 자칭 보수파는 그런 신화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대로”는 수구파의 구호다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당했을 때 일부 부유층은
오히려 훨씬 살기 좋아졌다면서 “이대로!”를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냉전과 민족대립을 넘어 화해로 가는 마당에 이들은
또 “이대로!”를 외치며 길을 막는다.
“이대로!”는 수구파의 구호이자
보수주의자들이 입에 담을 말이 아니다.
똑같은 콩으로 똥을 만들 수도 있고 된장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재질도 색깔도 비숫해 보이지만
수구와 보수의 차이는 똥과 된장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수구로 매도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보수적 지식인이라면
시민단체들을 홍위병이라고 욕할 것이 아니다.
장엄한 최후를 맞은 한말 보수주의자들의 엄정한 전통은
일제의 간지에 의해 온건하고 합리적인 지식인들이 더럽혀짐으로 인해,
그리고 친일잔재 청산의 좌절로 인해 계승되지 못했다.
군사독재에 의해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이 유린당할 때
보수주의자들이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운 사람들은
오히려 진보주의자들이었다.
진보와 보수의 편가르기에 앞서 보수세력이 먼저
수구세력과 스스로 결별해야 하지 않을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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