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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파일, 제의적인 죽음
2005-08-12 12:25 김정란 (상지대 교수)
X파일 덕택에 그렇지 않아도 무더운 여름이 더욱 무덥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더위는 대단히 제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 단계 보다 나은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 공동체 전체가 치러 내야 하는 일종의 통과제의, 유사(類似) 죽음. 모든 것이 일시적으로 무로 돌아간다. 존재의 의미는 완전히 거덜난다. 공동체는 자기 모순을 뭉뚱그려서 죽음의 제의를 치른다. 일시적 혼란이 찾아온다. 존재지수는 0으로 돌아간다. 우린 잘못 살았다.
그러나 그 죽음의 의미를 잘 파악하는 공동체에게 그 상태는 부활의 전야, 새로운 가치 출현을 위해 견디어 내어야 하는, 견디어 낼만한, 견디어 낼 수 있는 시련의 단계이다. 연금술사들은 찬란한 현자의 돌을 얻기 위해서 검은색의 니그레도 단계를, 상징적 죽음을 통과했다. 올여름의 지독한 무더위는 구시대의 타락이 푹푹 썩으면서 뿜어내는 니그레도의 열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X파일이라는 이름 자체가 얼마나 상징적인가. 그것은 물론 유명한 TV시리즈물에서 따온 기호이지만, 기호 수용자는 주어진 기표(記票)를 자신에게 의미있는 방식으로 해석할 권리가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해왔던 3공 이래 형성된 우리사회의 기득권 계층의 모든 행태에 X표를 치는 파일이다. 너흰 아니야. 그것은 거의 모든 분야의 지도 계층이 어둠 속에서 저질러왔던 추악한 행태를 망라하고 있다. 정계, 재계는 물론이고, 혼자 도덕적인 체 온갖 폼을 잡아왔던 타락한 거대 언론. 그리고 법의 엄정한 운용을 감시해야 할 검찰나리들까지.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그것은 자신의 추악함을 더이상 견딜 수 없다는듯이 그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터져나오게 된 동기 자체가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독재정권 시절부터 개인 사찰을 위해 미림팀이라는 도청 전담 팀을 시켜 개인의 사생활을 은밀하게 엿들어 왔는데, 국민의 정부 들어서 해체되게 되자, 앙심을 품은 미림팀 요원들이 사취한 정보를 가지고 거대기업을 상대로 금품을 뜯어내려다가 여의치 않으니까 터져나왔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파일을 입수하고도 만지작거리던 MBC를 조선일보가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언론의 정도와는 정반대의 길만 걸어온 이 신문지회사가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언론 본연의 의무를 자각한 결과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X파일의 뇌관을 딴 이후로 조선일보가 보이는 행태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두고 성서에서는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말한다.
진실의 법칙은 가차없다. 타락한 자들조차, 자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 자신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진실 쪽으로 물꼬가 잡히도록 기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 모순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제 아무리 협잡질로 1세기 가까운 시절을 버텨왔어도, 결국 자기 모순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진실을 피하려고, 꼰 다리를 이리 꼬고 저리 꼬고, 하다가 안되어서 남의 다리까지 가져다가 꼬고, 그렇게 하도 꼬다 보니, 꼰 다리가 내 다리인지 네 다리인지 모르게 되어 버린 것이다.
X파일은 물고 물린 채 추악한 거래 위에서 지탱되어 온 이 땅의 기득권 층의 추악한 얼굴을 백주대낮에 드러내었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어두운 그늘에서 음습하게 서로 뒤를 봐주던 추악한 권력이 이해관계가 달라지게 되자, 서로 으르렁대며 물어뜯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신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한 용과 다른 용이 서로 으르렁대며 상대의 가면을 쥐어뜯는다. 그리고 피차 쓰레기더미인 맨얼굴이 드러난다. 악취가 매캐하게 풍겨난다.
성배전설에서 영웅은 기이한 전설의 성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추악한 용을 만난다. 영웅이 놈을 베어넘기려고 준비하고 있는 동안, 용이 저 혼자서 위아래로 몸을 뒤튼다. 그러자 놈의 아가리에서 새끼 뱀들이 꾸역꾸역 기어나온다. 그 새끼 뱀들이 용에게 달려들더니 용을 물어뜯기 시작한다.
결국은 용도 새끼뱀들도 모두 죽어 나자빠진다. 영웅은 휘둥그레한 눈으로 그 처참하고 암시적인 장면을 지켜본다. 이 장면을 신화해설자들은 내면의 자기 모순에 의해 무너지는 세속적 왕국의 몰락으로 해석한다. 이 섬찟한 이미지는 『로스트 인 스페이스』라는 흥미로운 SF영화에서 되풀이된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에 의해 추악한 거대한 거미 괴물이 된 박사는 자신의 몸통에서 기어나온 새끼거미들에게 물어뜯겨 죽는다. 주인공이 했던 일은 단지 박사의 몸에 어린 아들이 건네준 장난감 화살을 박아넣은 일뿐이다. 즉, 타락한 박사의 삶의 방식과 순진한 어린 아들의 삶의 방식을 대비시켰을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박사의 자기 모순은 견디지 못하고 터져나온다.
이 일을 놓고 다급해진 기득권층과 거대 언론사들은 참여정부의 음모가 있다고 몰아부친다. 독재정권 시절 내내 온갖 추악한 행위를 앞장서서 저질렀거나, 그것을 열심히 옹호했던 자들, 국민 앞에 죽을 죄를 지었다고 사죄해도 시원치 않을 자들이 자기 모순을 견디다 못해 터져나온 일을 가지고 음모라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뻔뻔함.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은 특유의 삿됨을 사뭇 발휘하여 김대중 전대통령과 노무현 정권을 이간질시키기 위해서, 갑자기 김대중 전대통령을 위안하는 시늉을 한다. 김대중 대통령을 빨갱이로 물아부쳐서 죽이지 못해 안달했던 세력의 복판에 퍼질러 앉아서, 그를 바다에 빠뜨려죽이려 했던 독재자의 따님이 이끌고 있는 당을 위해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빨간 입술을 열어 독화살을 쏘아대며 사뭇 김대중 전대통령을 걱정하는 체한다.
그리고는 가해자가 갑자기 피해자로 둔갑하여 울먹이면서 지금 이 상황이 말세라고 한탄한다. 계란에 맞은 바위가 “아야 아야”하고 비명을 질러대는 형국이다. 하기는 전여옥 대변인의 진단이 옳다. 지금 이 상황은 전여옥 대변인이 성심껏 섬기는 기득권 계층에게는 말세가 맞다. 그러나 그 말세는 전여옥 대변인과 다른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개벽의 징조이다.
혹자는 불법도청이 본질이다, X파일의 내용이 본질이다, 를 놓고 논쟁을 벌인다. 그 두 주장은 모두 맞고 모두 틀렸다. 이것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양자가 모두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과거를 집약하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고통을 치르고 뛰어넘어야 할 모순의 집적이기 때문이다. 불법도청은 불법 도청대로 밝히고, 재발을 막기 위한 조치를 해야 하며, 또한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내용대로 사적인 프라이버시와 관계되어 있는 내용만 제외시키고 모두 공개하고, 범법 사실이 있었다면 수사하여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다.
혹자는 불법으로 취득한 정보를 공개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쩌다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불법적인 방식으로 알게 되었는데, 그 정보가 불법이므로, 병을 모르는 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불법으로 얻은 정보라 할지라도, 공동체 전체의 건강한 삶을 위협하는 행위들이 적발되었다면, 보다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 환부를 도려내고 가야 한다. 이건희 회장과 삼성도 예외일 수 없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이건희 회장과 삼성은 무엇 때문에 예외가 되어야 하는가. 그들은 초법적 존재인가.
파헤치면, 우리 나라가 거덜날 것이라고 협박하는 세력도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이 음습한 파일이 빛 속으로 나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 사회가 이미 매우 건강해졌다는 증거이다. 기득권의 발호가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한번 물꼬가 잡힌 진실 게임을 뒤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실게임은 일단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그 흐름을 막으려는 자가 있다면, 자신이 제일 먼저 그 물길 속에 빠져죽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터이다. 정치인들과 언론사들은 유야무야 넘어갈 생각하지 말라. 완전하고 투명한 공개만이 기득권의 타락이라는 악성 종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X파일을 통해 우리의 추악한 과거에 확실하게 X표를 치고 지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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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파일, 제의적인 죽음 /김정란
언론은 민족 자결 눈 떠라/김용옥
